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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 줄리아 보이드
  • 29,700원 (10%1,650)
  • 2021-09-24
  • : 353


나치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독일을 여행한 수십만의 여행자들이 경험했던 제3제국 나치의 실상은 전쟁으로 유럽을 몰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행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발전된 경제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인들의 안타까움에 뒤엉켜 보이지 않는 히틀러의 잔혹성을 모른체했다. '하이 히틀러'의 충성 맹세와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1930년대 독일 여행에서 여행자들은 왜 나치의 잔혹성을 애써 모른체 했을까?

책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은 1차 세계대전부터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당시 외국 여행자, 외교관, 언론인, 유학생, 독일 현지인 등의 편지들을 사건의 곳곳에 끼어 넣어 현실감을 준다. 나치 히틀러가 총통이 되고 독일 청년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리얼한 모습을 외국인의 시각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여행자들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우려만 있었을 뿐 2차 세계대전에서 겪게 될 죽음의 공포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나치가 잔혹성을 철저히 숨기고 구호와 선전을 통해 깨끗하고 질서 있는 독일의 모습과 과하게 친절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으로 집권한지 채 백일도 되지 않아 프로이트, 헬렌 켈러 등 유대인과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박해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동요되지 않았고, 독일인들은 모른체했다. 반공산주의와 경제 발전에 대한 나치의 기여가 상당했기 때문에 독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등의 소수의 희생은 받아들 일 수 있다는 생각들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은 히틀러의 선동과 정치적 구호 등 대규모의 행사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정치나 사상의 프로파간다가 기득권을 등에 업고 공동체를 좌지우지해도 되는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당시 독일 국민들은 왜 애써 외면했을까.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1차 세계대전 후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었다. 전쟁 동안 유대인들은 군인으로 참전하기를 주저했다. 패전 후 연합국이 주도하는 정부가 세워졌을 때 80%가 정부 관료로 채워졌다.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힘없는 정부의 모습을 보고 실망과 노여움들이 반유대주의로 확산된 것이다. 군인들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나약한 정부 때문이었지 참호에서 전투에 참전했던 용감한 군인들의 탓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참전 군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다시 전쟁으로 독일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내면에 자리 잡아 있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측인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번 볼셰비키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독일 내 공산당 조직의 반란이 국민들로 하여금 위기와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패전으로 이한 국경 봉쇄로 식량 부족과 석탄 부족으로 난방이나 기차, 배 등의 운항이 원활하지 않았다. 공급이 달리다 보니 초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국민들은 고통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이런 극단적 상황은 부풀어 오르는 풍선과도 같았고, 누군가 풍선에 손만 된다면 터져버릴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전쟁의 패전 책임과 보상을 담은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인들을 패배자인 동시에 악으로 규정하고, 식민지를 빼앗고, 산업체와 시민을 감시하는 등 통제 정치로 몰아갔고, 독일인들은 폭압적인 억압으로 불만이 쌓여만 갔다. 특히, 암담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들은 젊은 청년층에게 혁명적 사상으로의 길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연합군에 대한 복종과 두려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죄는 없고 적개심과 복수심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 현상은 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고, 히틀러와 같은 선동가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독일 문화 예술, 정치, 사회]

1920년대 독일의 문화는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들의 연주회와 오페라, 영화관람이 드레스덴과 베를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외국 여행자들은 예술 작품의 품질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고, 자체 극단을 가지고 있는 독일 도시가 백 군데가 넘고 영국 오페라 극단이 운영하는 곳도 40여 곳 가까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유태인 예술인에 대한 히틀러의 박해의 시곗바늘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1929년 미국 증권가 붕괴로 대공황에 접어들면서 식량, 연료 부족이 극심해졌고, 유럽 전체가 힘들었지만 독일은 전쟁 배상금까지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 정부, 공산당, 유대인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가 깊어진다. 유대인 폭행과 상점 파괴 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나치당이 1932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되고, 그로부터 1년 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고 유대인 저자의 책을 불사르게 된다. 책을 불사르는 자는 결국 사람도 불사른다는 말이 있다. 진시황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지옥의 문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독일 중산층들은 독일이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했으며 깨끗하고, 가게에 물건이 많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다량의 맥주와 와인을 소비하고, 호텔에는 항상 뜨거운 물이 나왔다.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공공장소에서 화장을 하는 것은 비난받았지만 희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주 각 마을마다 개최되는 청년 나치 당원들의 정치적 구호와 횃불 행진이 만연했다. 바그너의 작품으로 친 나치 행사가 있었고 농민들의 축제에서 히틀러가 등장하면 엄청난 관심을 이끌었다. 대포와 전투기가 동원된 모의 전쟁을 보여 주는 등 정치적 행사들이 주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반면 유대인, 공산주의자, 집시, 동성애자를 수용소에 가두고 교화시키고 외국의 정치가와 언론인들을 초청해 견학시키면서 나치는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정당화했다. 과거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이 히틀러를 모방했었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치는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재향군인회장, 현직 고위 장교와 정치인들을 독일로 초청하여 그들의 노동 현장, 수용소 등을 시찰하게 하고 환대한다. 죄인들 대신에 교도관을 위장시킨지도 모른 체 영국의 고위 관리자들은 반유대주의에 우려를 하면서도 독일인의 혁신, 근면 성실함에 감동을 받는다. 미래에 다가올 전쟁의 악몽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버린다. 왜 영국인들은 애써 외면하고 미리 대처를 하지 않았을까? 나치의 전략에 완전히 속은 것일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독일의 발전된 모습, 건강한 사회 질서, 반유대주의의 가면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준다. 전쟁 준비와 인종차별을 숨긴 채 사람들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악마의 발톱을 숨긴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독일 국민투표에서 99.7%의 찬성이 있었고, 합병이 이루어지자 독일 국민들은 축포를 쏘며 축하했다. 그 시각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은 돈을 빼앗기고 어디론가 기차에 몸을 싣고 이동하고 있었다. 왜 독일 국민들은 나치에 동조하고 말았을까?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에게 일부 국민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1938년 9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중 독일어를 쓰는 지역을 전쟁 없이 흡수합병한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들이 뮌헨에서 승인하고,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결과를 귀국 후 영국 국민에게 기자회견을 통해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서류를 보여주며 연설한다. 영국은 왜 독일에, 히틀러에게 쉽게 속았을까? 전쟁 전 영국 지도층을 초청해 보여줬던 독일의 긍정적인 면들이 영국의 눈과 뤼를 멀게 하지 않았을까? 가장 중요한 언론들조차 히틀러의 마약에 취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편협하고 무비판적인 언론의 행태가 악의 뿌리를 단단히 고정하는 데 한몫을 한 것이다. 결국, 뮌헨 조약 후 한 달 뒤 '수정의 밤'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상점과 집에 대한 대규모 파괴와 백여 명의 넘는 유대인 살해로 이어졌다.

암흑으로 부터 독일을 구해낼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던 히틀러의 선동 정치는 끝내 수 많은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을 남기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마감했다. 그리고, 그 선동에 이끌려 희망의 고삐를 쥐었던 독일 국민들은 인종차별과 살육을 통해 지옥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또한 주변국들의 정치가와 언론인들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어 냉철함을 잃어버림으로서 지울 수 없는 댓가를 치르고야 말았다.

선동과 편협함은 재앙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인류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일부는 고여서 썩어 가는 물처럼 변화하지 않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를 배려하고 돌봐야 하는 자연의 질서가 사람들 가슴속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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