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고 나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p.13, 첫 문장
이 책은 죽음과 불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삶과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연구 중이던 캄차카 반도에서 곰을 만난다. ‘만난다’라고 표현하지만 보통은 ‘습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그 만남이 어떤 과정으로 시간과 공간, 육신과 영혼을 가로질러 가게 되는지를 따라간, 작가 스스로의 복기이자 검증이고, 변신의 비망록입니다.
“꿰매고, 씻기고, 자르고, 다시 꿰매고. 나는 시간관념을 잊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 둘은 알코올 냄새가 나는 어둑한 대서양에서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파도에 휩쓸리며 부유한다.”
-p.18, ‘가을’ 中
이 책은, 가을, 겨울, 봄, 여름, 이렇게 4개의 느슨한 챕터로 되어 있습니다. 곰과의 만남 (혹은 습격) 후에 그 계절들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피와 살의 고통에 시간과 계절이 봉합되며 또 그렇게 관계로 연결됩니다. 인생은 한없이 불확실하고 또한 속절없습니다. 계획은 뒤틀리고, 육신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변형과 변화, 그리고 변신에 이르릅니다. 마음과 영혼도 당연히 그러하고.
“살페트리에르 병원. 내 안식처가 돼야 했을, 그러나 결국은 지옥으로 추락시키는 낭떠러지가 된 이 장소의 기억들은 어떻게 다시 짜맞출 수 있을까?”
-p.59, ‘겨울’ 中
습격이 남긴 작가의 턱 수술 부위는, 러시안 방식으로 고정된 소련의 플레이트는 프랑스 방식으로 서방의 플레이트로 교체하는 수술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의료 냉전 현장’이 되었다가, 파리와 지방병원들 사이의 치졸한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만남이 고통과 혼돈과 전쟁에 이르는 과정이 계절을 따라 흘러가는 작가만의 장광설은 인상적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상황들을 상정하노라니 어쩌면 언제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면 웃프기만 합니다.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p.145, ‘봄’ 中
예기치 못한 일을 마주하는 것. 다리아가 마주한 어느날 무너져내린 소련, 작가가 마주한 곰의 습격, 그리고 얼마 전 우리 모두가 마주했던 COVID-19. 단 한번, 한순간의 조우가 이끄는 삶의 향배, 그 불확실성의 주체는 무엇일까? 그런 변곡점들과 우여곡절이 만들어내는 생의 예기치 않은 등고선은 어떻게 타인과 공명하고 때론 변주되며 나아갈테지만, 그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똬리를 튼 생각들은 그 꼬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또 그럴 기력조차 없기 일수였던 개인적 기억까지 포개집니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존재는 무엇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동받는다. 이것이 나의 해방이다. 삶이 주는 한 가지 약속. 불확실성.”
-p.172, ‘봄’ 中
어느새 가을이 이끈 겨울을 지나 겨울이 내어준 봄은 여름에 이릅니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도 끝이 납니다. 그리고 야수가 만들어 낸, 어쩌면 마주했을지도 모를 다른 우주를 떠올리며 멈춰서거나 뒤돌아갈 수도 있었을 그 순간, 기회를 딛고 작가의 속삭임 같은 굳센 결심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격려이고 또한 약속이다 싶습니다.
“시간이 되었다. 나는 쓰기 시작한다.”
-p.177, ‘여름’ 中, 책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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