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나고 자란 고향에서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시간을 서울메트로의 영향권에서 살아내었고 살아남았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살아남았습니다. 처음 이곳 서울의 풍경으로 아직 제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지하철의 환승 장면이었습니다.
열차 내 안내방송에 따라 환승역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00미터 육상선수의 긴장감 마저 서려있는 채비를 합니다. 옷 매무새를 매만지고 가방을 고쳐매고 하나 둘 출발선, 아니 출입구 쪽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정차와 동시 문이 열리면 전속력으로 달려나갑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제겐 거의 초현실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을 지나고나니 어느새 제 자신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 환승의 세계 신기록을 갱신하기라도 하려는 듯, 최적의 코스와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그 환승의 대환장쇼에 당당히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이 서울, 바로 서울이었던 것입니다.
“만원 버스가 된 서울에 가까스로 올라탄 사람들은 손잡이 하나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서울 시대’의 긴 터널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중략) 그리하여 내 임무는 제도권 학자들이 관심 두지 않은 영역의 문화를 대중에게 소개하여 기억시키는 것으로 삼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p.10~11, ‘프롤로그’ 中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밝힌 포부대로, 이 책 <서울시대>는 우리네 삶의 이곳저곳에서 들춰내고 기억해내면 낼 수 있는 보잘 것 없어보이는 서울의 대환장 시간을 촘촘히 훑어내는데 최선을 다해내고 있습니다. 책을 다읽고 만나게 되는 빽빽한 각주는 일간지의 기사들에서 발췌해서 기록한 성실한 발자국들과 손자국들을 넉넉히 알아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만큼 미덥고 그만큼 반갑고 또 그렇게 소중한 우리 시대의 기록을 알뜰히도 담아내고 있습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부 서울시대, 2부 서울살이, 3부 서울내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삼촌 이모 고모 형님들의 시간의 파단면을 의식주를 바탕으로 거기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관계의 경로들 그리고 장려되고 제한되었던 만원 서울에서 생존하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영화가 한 편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찾아서 보곤 하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백투더퓨처 2>입니다. 이 영화에서 보면 미래에서 가져온 스포츠경기 모음집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만약 서울 시대의 초창기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2025년으로 와서 이 책을 몰래 가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시대와 역사의 굴곡들을 잘 헤쳐내며 썩 괜찮은 라이프 스타일을 구가하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내적 폭소를 마구 터뜨렸습니다.
그러기에 이 책 <서울시대>는 대한민국의 시대상으로 확대해석하는 돋보기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그 당시 지방 소도시에 살았던 제게도 꽤나 유용한 기억저장소 역할을 해낼만 했습니다. 허세와 실속의 깍쟁이들이 ‘서울 사투리’를 구사하며 전국에서 모여든 시골쥐들의 대합실 같았던 과거의 서울이 어떻게 지금의 메가시티에 까지 이를 수 있었는지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는 썩 괜찮은 우리들의 일기장이기도 하겠습니다.
#서울시대 #청계천판자촌에서강남복부인까지 #유승훈 #생각의힘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 쿠키:
“새는 구멍 미리막아 가스중독 방지하자”
-p.73, 연탄가스위해방지전시회 포스터 문구
국민학고 1학년 때의 기억 중에 가장 슬픈 장면 하나.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난생 처음 나의 짝꿍이 되어 그 맛에 가깝지도 않던 등하굣길을 즐거이 했던 것 같은데, 어느날 그 짝꿍이 안보이고 한동안 빈자리로 있다가 다른 아이로 짝꿍이 바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 여자애 부모님이 시내에서 식당을 하셨고, 식당에 딸린 뒷쪽 방에서 온가족이 같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어느 밤 연탄가스가 그 방바닥의 틈으로 새어나와 온가족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었고 모두 다행히 잠에서 깼지만 그애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