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품 <피와 기름>으로 단요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마도 필명으로 보이는 작가의 이름이 주는 묘한 뉘앙스 만큼이나, 책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묘한 구석이 다분했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짧지 않은 이야기를, 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한, 요약이란 것을 해보자면… 우혁이라는 인물이, 필연일 것만 같은, 도유와의 우연한 만남들과 그 만남들이 이끄는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그 안팎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요새 어쩌고 사냐?”
-p.11 (소설의 첫 문장)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들인 <두 도시 이야기>, <안나 카레니나>, <이방인>, <설국>이나, 마지막 문장이 유명한 소설들인 <위대한 개츠비>, <198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문장들 만큼이나, <피와 기름>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은 꽤나 제게 인상적인 여운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러고 살기로 했다.”
-p.414 (소설의 마지막 문장)
따로 떼어놓으면 뭐 대단할 것 없는 두 문장들이,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 그 창조된 세상을 통과하며, 혹은 살아내며, 변모해가는 것을 초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독자의 입장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돌이켜보면 달리 보였습니다. 그믐에서 진행했던 박장살 (박소해의 장르살롱)에 남겨준 작가의 답변글을 통해서 저의 그 주관적 혐의는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생각에 생각을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제 뭘 하지?”
-p.51
“이제 뭘 하고 살지?”
-p.413
사는 것. 만나고 엮어가는 것. 복잡한 사상과 우연의 사건과 그 편린들이 확장해내는 것은 그렇게 또 ‘모든 것은 삶으로 수렴한다’는 단순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다시 요약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종교와 윤리나 철학 같은 제법 굵직한 지식으로 조적해낸 세계관을 낱낱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직관적으로 흘려읽을 수 밖에 없는 미천함을 탓하며, 좀 더 넓고 깊이 있는 읽기에는 실패했다는 아쉬움은 내내 남겨질 듯 합니다.
“나는 인간에게 풍요와 자유를 안겨다 줬다. 심지어 나를 욕보일 자유마저도.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끊임없이 불행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를까?”
-p.411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의 다미선교회 사건과, 1999년 12월 31일 노스트라다무스, 하나님의 교회 종말론 사건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들과 오버랩 되었던, 새천년파 에피소드도 꽤 충격파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펼쳐지는 현기증나게 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재미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이 소설만의 독특함이다 싶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만화경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그만큼 쉽게 읽으려면 이야기의 속도만큼 쉬리릭 읽어낼 수도 있지만, 신학적 지식과 윤리학, 사회학의 레이어에 접근해낸다면 느리더라도 깊이 있는 이야기 속으로 다이브도 가능한 소설, <피와 기름>. 아마 근래에 읽은 소설 중 굉장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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