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이 책을 읽는 동안, 장애물 달리기의 트랙에 세워진 수없이 많은 허들과도 같은 주석의 숫자들을 모른 척하면서, 혹은 나중을 기약하며 읽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만큼 명쾌한 문장과 모호한 문장이 만나고, 그 속의 날 것의 생각과 숙성된 생각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파열음과 섬광 같은 무언가 순수한 에너지 같은 탄성이 분출되어 마침내, 어떻게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와 칸트가 씨줄과 날줄처럼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독자들을 이끌어내는지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독서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결국 보르헤스가 그의 글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듯이, 그에게 시적인 약속을 배반하는 듯 보였던 말의 불명료성을 적절히 이용하면 그 자체로부터 다른 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p.53
“...또한 어렸을 때 독일어를 익히기 위해서 읽었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부터 보르헤스가 잠깐 행복을 느낀 그날 오후의 흐름을 붙잡아서 영원으로 변질시키기를 바랐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세상에 풀어헤친 바로 그 원리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과학의 은밀한 맥락들을 유려하게 흐른다.”
-p.192~193
“우주에는 궁극인이 있어야 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본 아인슈타인의 믿음에 자극을 받은 하이젠베르크는 시공간의 작은 편린들 사이를 기계론으로 중재하려고 하면서 안개상자 내부에 전장의 경로처럼 찍힌 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공간 속으로 깊이 뛰어들었다.”
-p.287~288
“칸트는 현대 물리학으로 가능해진 극한적인 측정을 접할 수 없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과적 사슬을 깨고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한계점이 나타난다. 분석이 거기에 놓인 이율배반의 어느 한쪽에 안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추론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휴리스틱적 가정을 우리가 기정사실로 취급하는 한 그 이율배반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p.356~357
긴박감 넘치는 한편의 영화 예고편과도 같은 짧지 않은 서론을 통해 저자인 윌리엄 에긴턴이 보여주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문학과 양자물리학과 철학이라는 전혀 다른 우주가 하나의 더 커다란 우주에서 만나고 있음을 4부작 미니시리즈로 태어난 듯 합니다.
서론(프롤로그), 제1부 시간의 편린 위에 서다, 제2부 신이 아닌 존재, 제3부 우주에 끝이 있을까?, 제4부 자유의 심연,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보르헤스의 단편들, 하이젠베르크의 발견, 칸트의 체계는 이러한 환상에 깔린 전제, 앎과 존재의 완벽한 일치는 더 깊이 조사하면 스스로 파괴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p.371
어려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방식의 탁월함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자꾸만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이 책 <천사들의 엄격함>은, 그런 이유에서 철학과 과학과 문학의 통섭을 통해 더 나은 우리로 향하는 길을 넌저시 제시하고 있는 인상을 받습니다. 곁에 두고 이따금씩 아무 페이지라도 펴서 아무 문장이라도 읽어내리다 보면, 좁디좁은 이슈에 매몰되어 찰나와 같은 인생을 덧없이 소비하는 현대인들, 특히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필요한 혜안이 무엇인지 설파해주는 구석이 다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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