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목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느릿하니 눈을 부비며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하게’ 끓여낸 국수 한 그릇 말아 겨울소주와 함께 반상에 소박하게 올려놓는 모습. 나는 그 상상으로 들어가 술잔에 소주를 찰랑하게 채우고 한 모금 더 들이켜 본다.”
- p.25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무서운 책이었습니다. 에세이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것저것 모조리 술맛 땡기게 하는 이야기들을 무방비 상태에서 그저 망연하게 받아들이고만 있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경험하거나 들었던 언젠가의 추억들을, 잊은 줄만 알았던 그 냄새와 빛깔과 맛들을 소환해내서는 그렇게 이야기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추억에 취하고 맙니다. 술 같은 책, 무서운 책이었던 것입니다.
김혜나 작가는 창작을 위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처절한 창작의 노동을 하노라면 고달프기도 하고 권태롭기도 하여 다니는 국내외의 로컬 술들을 마셔보는 취미가 자라나게 되었다 합니다. 일본의 사케, 태국의 쌩솜과 홍텅, 부다페스트의 요리용 와인, 미국의 버번위스키와 맥주가 지어낸 작품들이 여럿 되었노라 말합니다. 그렇게 술은 노동주가 되고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합니다. 그런 취미가 쌓아올린 우리 술 이야기로 이 책의 페이지 페이지 마다 배어있는 술향이 제법 심쿵합니다. 산과 들과 바다가 나오고, 또 술이 찰랑 한잔 채워지고, 그렇게 시가 리드미컬하게 끼얹어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 책은 무서운 책입니다. 어쩌면 읽다가 잠시 접고 운전할 일이 생긴다면 양팔을 벌려 대여섯 발자국을 비틀거림 없이 걸을 수 있는지 확인할 것을 감히 조언하는 바입니다.
“사람의 인생과 세월의 깊이를 품은 시와 술이 있는 한, 나에게 남은 생명의 술이 얼마큼이든 관계없이 주어진 시간을 언제나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 법하다.”
- p.178
술과 시와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로 태어나는 관계의 발효. 이 책의 굽이굽이 사연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 마주했던 소주의 맛, 그 퀴퀴한 냄새가 싫어 울면서 호소했던 메주의 향도, 이젠 그 당시 어떤 향취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곤 했지만 분명히 장면으로 남아있을 맛과 추억이면 되지 않을까 하며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니 켜켜이 쌓여 가는,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지나온 시간과 관계의 나이테는, 그렇게 술이 되고 시가 되어 무르익어가는 나, 너, 우리가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싶어집니다. 그래서 쌀이든 포도든 고구마든 그 재료는 같아도 빚어지는 술의 맛과 빛깔은 태도와 시간을 통과하며 여러 가지 베리에이션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술은 또 시는 마시는 자에게 저마다 다른 맛으로, 추억으로 녹아들어가는 거다 싶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하는 소중한 인연에게,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찾은 가장 소중한 나에게 건네는 술 한잔이 아주 맑고 달았다.”
- p.150
이번 주엔 친구들 연락해서 시원한 달 그늘 아래서 맛난 우리술 한잔 하자 해야겠습니다. 아주 맑고 달, 그 시간이 지금 무척 고픕니다.
#술맛멋 #김혜나 #소설가 #작가 #에세이 #우리술 #전통주 #은행나무
#술 #문학 #박찬일 #셰프 #추천 #자연 #계절
#도서제공 #서평단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