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오사카는 전성기를 맞았지만, 오사카성은 벼락을 맞아 천수각이 불타는 등 시련에 시달렸다. 소실된 천수각은 수백 년 동안방치되었다.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는 난공불락의 성이 필요 없었던탓이다. 천수각은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까지 지난 1931년이 되어서야 다시 지어졌다. 여기에는 당시 오사카가 도쿄를 제치고 명실공히 일본 제1의 도시로 올라섰다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P92
쓰루하시 시장의 왁자지껄한 활력 뒤에는 80만 재일교포들의 고단했던 역사가 숨어 있다. 비극의 시작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본제국의 국민, 그것도 차별받는 2등 국민이 되었다. 일본 ‘본토‘의 1등 국민들이 몰려오자 식민지의 2등 국민들은 땅도 집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 P109
이렇게 늘어난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자이니치조센징)의 수는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200만 명에 달했다. 해방 후 그중 140만 명가량이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60만 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에 남았다. 특히 군수공장이 몰려 있던 오사카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재일조선인이 남아 있었다.- P109
하루아침에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자이니치를 향해 각종 차별이 시작되었다(사실은 차별하기 위해 무국적자로 만든 것이다). 의료보험이나 연금에 가입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취직할 수도, 심지어 집을 임대할수도 없었다. 자이니치의 역사는 ‘차별을 없애기 위한 투쟁사‘라 해도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일본에서 자이니치로 사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