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은 소녀를 수줍게 사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소녀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래서 먼 훗날 다시 만났다면 소년은 그래도 소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실 사랑이란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랑도 분명히 존재한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며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랑이 참 귀한 것은 시간의 변화, 세월의 흐름은 그 감정을 분명 변하게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스콧 피츠제럴드란 작가도 처음 만났고 개치비도 처음 만났다. 개츠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왜 붙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있었지만 책을 읽고 나선 그 호기심이 해결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 소설이다. 물론 당대의 미국 역사를 조금 더 알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더 유익하겠지만 굳이 몰라도 된다. 사랑 소설로 읽는다면 배경 지식 따위야 그냥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음미하면 된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 흡사한 것 같지만 결국 이 둘의 관계는 금방 끝나고 만다.
그런데 위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집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데이지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다. 다만 그 상황이 그 시대가 그 환경이 그 둘을 아니 데이지의 마음을 돌이킨 것인지도 몰랐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대 배경을 알면 더 흥미로운 것들이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음에 또 기회가 닿아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면 이땐 미국의 20세기 초의 역사들을 먼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동부와 서부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 당시의 신분 계급은 어떠한지, 문화와 경제 수준은 어떠했는지 이런 것들을 알고 나서 소설을 읽는다면 조금은 더 남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의 등장 인물들도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다. 독자들도 개츠비를 보는 시선이 다를 것이다. 그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개츠비는 자기 방식대로 한 사람을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우리도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삶을 인생을 사랑하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