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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rl who can't be moved
  • 언더 그라운드
  • S.L. 그레이
  • 13,320원 (10%740)
  • 2016-05-18
  • : 293

 

불쾌하다. 머리도 아픈 것 같다. 보리차를 끓여놓고 식힌다고 뒀는데, 때 모르고 더워진 날씨를 생각 못하고 너무 오래 내버려둬서 걸쭉하게 변질된 보리차 같은. 그래, 그런줄도 모르고 그걸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무심코 벌컥벌컥 들이킨 것 같은 기분이다. 딱 그렇다. 게워내고 싶은데 게워낼 수도 없는, 그런다고 이 찝찝함과 불쾌감이 없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소설이다. 너무 혹평인가? 그런 것 치고는 정말 신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내 방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성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갇혀 있다고. 이걸 얼른 읽어내고 결말을 봐야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몰입감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아시아를 시작으로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퍼진다. 놀랄 것도 없이 언론에서는 당장 세상의 종말이 닥친 양 호들갑을 떨어대고, 편집증 종말론자들은 핵폭탄이 떨어진데도 안전하다는 그들만의 성소로 모여든다. 황야에 위치한 생존형 지하벙커 ‘성소’는 정수시설, 공기정화시설, 수경재배시설 등을 갖춘 최고급 주거시설이다. 첨단 보안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안에서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안으로 침입할 수 없고, 벙커 내부에 갖춰진 식자재들만 갖고도 입주민들이 1년가량 걱정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젊고 유능한 커플과, 신앙심이 유독 신실한 것 같은 가족과, 성공한 이민자 가족과,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까지. 성소에 입주한 주민들은 그들만의 기대를 품고 성소에 왔지만 의문의 변사사건이 발생하고, 성소가 밀실화 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되어간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에, 이야기는 후던잇(who done it)의 후를 찾아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짐 브라운의 『24시간 7일』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는데 난데없이 기리노 나쓰오의 『도쿄섬』이 튀어나온 듯 한 격이랄까. 그것도 별로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던,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던, 어떤 지위에 있던 사람이던 같은,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폐쇄된 성소에서는 무의미해진다. 사람들은 갇혀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광폭해지고 야비해진다.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오직 생존만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자 도덕도 종교적 신념도 뒷전이 돼 버린다. 그 와중에 사람 한, 둘이 죽어 나간들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항상 이런 짓을 한다. 전쟁 말이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한다. - 441쪽

 

사람다운 생활은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해서 최소한의 생명 유지조차도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연쇄 살인인 것 같은 수상한 사건이 벌어진다고 치자. 어떨 거 같은가? 미친 살인마의 칼날이 나를 향해 겨눠질까 두려워하게 될까? 아니면 입이 하나 줄어 내가 하루 더 연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될까? 참 불편한 질문이다. 극한의 상황까지 몰렸을 때 끝까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재난의 상황을 다룬 책이든, 영상이든, 그 어떤 것이든 에서는 항상 위대한 지도자나 선의 극단에 선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해 사람들을 구원했지만, 글쎄. 정말 현실로 그런 일이 닥친다면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걸 건드리고 있는 소설이다. 살인이 나지만 ‘범인이 누구일까?’ 보다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다. 그래서 정말 끝까지 긴장하며 몰입해서 읽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연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까?

 

마지막장은 작가의 장난 같다.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끝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에 독자를 몰아넣고는 자기는 쏙 빠져버리는 작가가 한없이 얄미워진다. 마치 영화 한편을 제대로 감상한 기분이다. 여운이 너무도 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미묘한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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