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요리책이라 함은 사진 보는 맛이요, 그림 보는 맛이다. ‘내가 저걸 해먹어야지’ 해서 본다기 보다는 ‘저거 참 맛있겠네’ 하면서 보는 책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읽는다>라는 동사는 갖다 붙이지 못할 바도 없지만 왠지 가져다 붙이기 어색하지 않은가. 누가 요리책을 읽는담? 보는 거지. 그런데 이 책은 참 정독하게 만드는 요리책이다. 아니, 요리책인가? 소설인가?
문제적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패러디한, 제목도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왜 50가지일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면,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좀 더 명쾌하다. 말 그대로, 닭을 메인으로 한 요리법 50가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닭이야 찌든 굽든 튀기든 볶든 뭘 해도 맛있는 식재료지만 그 조리법이 50가지나 된다니 상상하기도 버겁다. 서양에서는 닭보다는 칠면조나 오리를 즐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치킨에 대한 욕망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건가보다. 주로 튀기거나 삶는 조리법이 보편적인 우리와는 다르게, 책에서 소개하기는 버터나 와인은 기본이고 갖가지 향신료를 사용하여 굽거나 튀겨내는 요리법이 주를 이룬다. 상당히 이채롭다. 멋스럽다.(물론 닭 얘기다. 닭을 손질하는 근육질 오빠 말고)
그의 말이 계속해서 내 영혼의 은밀한 어둠 속에 메아리친다. ‘세련미가 관건이야.’ 치킨은 세련된 요리가 아닌걸. 내 무의식이 불현 듯 스스로를 비웃는다. 나는 바보 같은 속생각에 부끄러워 빨개진다. 하지만 꿈은 꾸어 볼 수 있잖아, 나도 여자인걸. -11p
그렇다. 그녀는 암탉인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냉장고에서 떨어져 나온 생닭(16호쯤 되는 특대형이다)과 잘생긴 요리사 일명 ‘칼잡이씨’의 짧은 에피소드에 이어 상세한 요리법과 각종 팁들이 뒤따르는 구성이다. 요리에 세심한 공을 들이기를 좋아하는 요리사 오빠는 어느 날 냉장실 밖으로 탈출한 생닭을 보고 무궁한 요리의 창작욕이 불타오른다.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식재료인 닭을 보고 의욕에 불타올라 한 달 동안 50가지 요리를 창안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은 요리사 오빠의 그 대단한 다짐에 대한 결과물이며, 그 과정을 곁에서 하나하나 꼼꼼히 지켜본 당사자이자 관찰자인 치킨양의 시선에서 서술되어 있다. 요리사 오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던 영계양은 레시피가 쌓이고 칼잡이씨가 더욱 능숙하게 닭을 주무를수록 점차 친근해지다 못해 거의 연인이 되어 간다.
“난 매일같이 매주 당신을 맛보길 원해. 내 재료가 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이 돼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작업에 당신이 그 중심이 되었으면 해. 나는 당신을 갈구해, 암탉양.”
“나에게 요구하는 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요?”
“영계 아가씨. 내 전문분야가 돼 주겠어?” - 151p
요리 스승의 그늘에 있던 칼잡이씨가 비로소 닭을 전문으로 하는 어엿한 요리사로 거듭난다. 닭을 메인으로 한 50가지 요리 창안 도전기가 한창일일 때 요리책 출판의 제안을 받고 더욱 고급진 닭 요리 창안에 도전하면서 이 요리책(혹은 소설책)은 더욱 풍성해 진다. 갈수록 뭔가 실제로 도전해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재료들과 이색적인 향신료들이 등장하지만 그럴수록 소설적(?)인 재미는 더해져만 가니 이래저래 뒤로 갈수록 흥미로운 책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은 독자라면 깨알같이 패러디된 다양한 설정들에 배꼽을 잡을 테고, 안 읽은 독자라도 섹시하게 밀당하는 생닭과 요리사의 만담이 아주 마음에 들 것이다.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요리책이 아니라 소설책으로도 나름 평타는 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웃기다.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웃긴 책은 거의 읽질 못했다.
한가롭게 치맥을 하면서 읽어도 좋고, 냉장고에 싱싱한 생닭을 넣어두고 읽어도 좋을 책이다. 요리책이면서 정독하게 만드는 책이라니, 그런 책이 다 있었다. 아니, 소설책이라고 해야 하나?
** 치덕 리뷰단의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