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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채우는 감각들
- 에밀리 디킨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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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 2022-12-15
: 871
좋아하는 작가들 책을 읽으면 자꾸 페소아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몇 년 전 페소아의 시집을 샀었는데, 한두 번 들춰보고는 그대로 덮어두곤 지금까지 다시 펼쳐보지 않았다.
잘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인용한 부분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고. 뭔가 심오하고 독보적이며 시다운 시인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내가 잘 모르겠는 건가, 역시 나는 시에 좀 약한가 하며 시무룩해져서는 시집을 덮었었다.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필사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춤이라도 추려다가 다행히 춤을 추지 않은 것은, 그 시인 중에 페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3 수험생일 때는 너무 다행히도 문과생은 미적분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나는 평생 미적분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라는 생각과 ‘그래도 참말 다행이지’라는 생각이 지금도 가끔 묶음으로 떠오르곤 하는데, 페소아는 지난 2년 간 내게 그런 미적분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페소아가 네 명의 시인 중 한 명이라니! 하며 아쉬워했던 것. 이 책을 직접 펼쳐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역시 민음사라 쓰고 믿음사라 읽는 이 위대한 출판사의 편집자님들은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렇게 왜소한 문학적 소양을 가진 내가, 비로소 페소아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버렸다. 시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아도(시를 읽을 때 자주 겪는 일) 이 시 집에 들어 있는 시구들을 한 자 한 자 따라 적다보니 어느 새 페소아의 세계, 에밀리 디킨슨의 세계, 프루스트와 바이런의 세계에 들어가 있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더이상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세계의 시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잘 사랑하는 이들이 고르고 고른 시인, 그들이 고르고 고른 시, 고르고 고른 시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정성과 사랑의 선택으로 실어 놓은 시의 조각들은, 나로 하여금 시 자체를 더 사랑하게 하고 시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해 주었다.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다가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지 않는다.
그간의 필사책들이 너무 대중적인 시들만을 담아 필사책이라고 하면 눈을 질끈 감았을 문학쟁이라면, 문학쟁이인데 에밀리 디킨슨이나 페소아는 좀 어렵다 했던 사람이라면 꼭 눈독 들이시길. 그들의 세계에 어디부터 어떻게 들어가면 되는지 이 책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책의 만듦새도 참 좋다. 천재 디자이너가 있는 믿음사, 아니 민음사이지 않은가ㅋ 어디를 가더라도 부담 없이 갖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두께, 무게이고 양장본인데가 매끈한 감촉마저도 좋다. 계속 쓰다듬고 있는 나를 몇 번을 발견했는지.
종이도 나름 도톰하고 잉크조이 같은 잉크 콸콸 나오는 두꺼운 볼펜도 견디어 낸다. 다만 만년필 사용에는 조금 제약이 있다. 만약 만년필로 쓰고 싶다면 피딩이 조금 덜 좋으면서 얇은 만년필과 흐름이 박한 편인 잉크를 쓰면 된다. 나의 경우에는 트위스비 다이아몬드 EF닙에 디아민 냉정과 열정 잉크를 넣어서 썼다. 이 조합으로 쓰면 번짐과 비침이 거의 없다. 걱정없이 즐겁게 만년필로도 필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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