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통해 보는 세상, 그리고 우정
자작나무그늘아래(hjpae) 2011/05/25 00:10
자작나무그늘아래(hjpae)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설흔
- 13,320원 (10%↓
740) - 2011-04-20
: 527
제목으로 보나, 표지의 그림으로 보나 책의 내용을 조선조 풍류가객의 이야기쯤으로 생각했던 나는 막상 책을 열어보곤 그 내용의 무게감과 아름다움에 놀라움과 함께 기쁨이 교차했다.
좋은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아서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마음에 쏘옥 드는 책을 만나다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내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나는 김려나 이옥이란 인물이 무척이나 낯설다. 그나마 김려의 이름 두자는 들어본 듯도 하지만, 이옥의 이름 두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내 무식함을 자랑하자고 한 것은 아니나, 이제야 이들을 알게 된 것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문체반정으로 고초를 겪은 이옥과 김려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그들의 우정과 글쓰기를 주 내용으로 하여 풀어낸 이야기다.
글쓰기를 통해 우정을 논하고, 우정을 통해 글쓰기를 말하고자 한 것이 본래 이 글을 쓰게 된 취지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조선조 1792년에 일어난 문체반정의 실상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체반정은 정조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보수 세력과 정조의 연합 아래 이루어진 보수 반동적 문화정책이었다.
이옥과 김려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문화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이라고만 생각했던 정조가 이토록이나 깐깐하고 고집스런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었다.
소품체로 재기발랄하고 살아있는 글을 썼던 이옥은 크게 처벌받게 되고, 친구의 사정을 보면서 눈치껏 몸을 사렸으나, 김려 또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후, 또다른 친구이자 실세인 김조순의 도움으로 논산의 현감으로 가게 되고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던 중, 이옥의 아들 우태가 방문하게 된다.
한편 이옥은 왕의 강력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서체를 바꾸지 않아 충군의 처벌을 받게 되고, 과거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되어 평생을 길에서 보내게 된다. 아들 또한 바로 그 길 한가운데서 얻었다.
김려는 우태와의 만남을 통해서 잊고자 했던 유배지 부령과 진해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되고, 그곳에서 사귀었던 사람들과의 진솔함이 담긴 글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옥과의 우정과 그와 함께 했던 글쓰기가 곧 삶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지방의 세력가인 노론 최수용의 손아귀로부터 우태를 구하고자 현감자리를 내놓은 김려. 그는 이옥의 글을 정리하고, 살아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던 부령으로 하인이자 평생지기인 위서방과 함께 떠난다.
성균관 유생으로 앞날이 촉망받았던 두 사람이 이렇듯 정책의 희생양의 되어버렸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결코 자신들의 창작 지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옥이 그랬듯 이들 하나하나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살아가야 할 터였다.그게 바로 글이 되어야 할 터였다. 방 안에 틀어박혀 음풍농월하는 거짓된 글 따위는 결코 짓지 않을 터였다.(p168)
무조건 글짓는 것은 경계해야 하네. 남들이 짓는 글이나 지어서는 안 되고 글 속의 사람이 되어야 하네.(p191)
조선 최고의 천재적 문장가인 이옥, 아무리 빈궁하고 어려워도 자기의 마음이 거절하는 일은 도무지 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는 글이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던 것, 그의 삶 전체가 바로 글쓰기였던 것이다. 그런 이옥의 글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알아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려였던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참된 우정을 나눈다는 것. 이것만큼이나 지난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평생을 두고 꿈꾸었던 것이었지만.....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나의 마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우리의 서 있던 자리가 허망했던 것일까. 혹시 헛된 공명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책에서는 이옥의 글의 아름다움을 김려의 입을 통해 드러내주고 있지만, 평범하다고 스스로 자평하는 김려의 글, 또한 나의 눈으로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글이었다.
조선의 문장가인 두 사람의 글을 만나는 즐거움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덧붙여, 조선의 문장가라고 하니 이덕무의 그의 벗들 이야기를 담은 <책만 보는 바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늘 차 안에 가지고 다니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에, 이동하는 짬짬이 읽다가 던져두곤 했었는데, 어느 한 날을 잡아서 정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와 비교해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남다를 것 같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