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2013년 10월12일 서울고검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은 윤석열 검사가 했던 이 말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가 이런 대답을 하기 직전, 어떤 질문이 있었는지 장면을 좀 더 뒤로 돌려보자.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에서 배제된 윤석열 여주지청은 이날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직원의 체포와 공소장 변경 신청 등에 대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 보고했다고 증언하며, 국정원 수사에 외압이 심각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수사 외압의 실체를 물으며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포함되지 않느냐는 의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막말을 쏟아내며, "증인은 조직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조직을 사랑한다는 말에 이어 나왔던 말이 바로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검사가 공정과 상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근거 없이 그가 깨끗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니까 깨끗하겠지...대선 당시, 막연한 희망에 사로잡혀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공정과 상식을 필두로 정권을 잡은 검찰정권 하에서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대통령과 가까운 검사 출신 인물들이 행정부를 장악하고, 거부권을 반복해서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요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희석되어갔다.
이 책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의혹 사건'을 눈에 보일 듯이 생생하게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려내면서, 이 사건에 들어있던 검찰정치의 작동 원리를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검찰의 자기반성 없는 역사와 기만적인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검찰정권의 신호탄이 되었던 김학의 사건의 주인공 김학의는 2019년 6월 기소된 뒤 총 다섯 번의 재판을 받았는데, 그 결과 뇌물수수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성 접대 혐의는 공소시효 만료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2심 재판부터 뇌물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지만 다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이후 무죄를 선고하며 파기환송심을 확정했다. 그리고 출국금지를 막아섰던 사람들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사건의 본질은 김학의의 뇌물수수 혐의와 성 접대 혐의인데, 출국금지를 둘러썬 여러 정황이 도마에 오르면서, 본질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김학의 사건'은 검찰권이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합하면 사법 정의가 어떻게 국민들의 상식에서 멀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30년 간 법조 분야에서 이력을 쌓은 저널리스트의 글은 파편으로 흩어져있던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김학의 사건을 중심으로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부조리한 흐름을 수사 과정과 공판 기록, 인터뷰와 언론 보도를 포함하여 방대한 자료와 꼼꼼한 분석 등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검찰이 가진 권한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공정'하고 '상식'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검찰이 지켜야 할 핵심 가치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의 핵심 가치를 내세워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김학의 불법 출금 의혹'과 '고발 사주' 사건 등에서 보듯 윤석열 사단이라 불리는 소수의 특수부 출신 검사들이 장악한 정권은 지금 국민의 기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반하고 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짓을 버젓이 저지른다.
민심을 배반하는 검찰정권은 2024년 4.10 총선에서 혹독한 중간평가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집권 여당이 개헌저지선을 조금 넘는 의석으로 참패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윤석열 정권의 '검찰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특히 '검찰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조국혁신당이 창당 한 달여 만에 제3당이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4.10 총선은 민심이 대통령과 여당뿐만 아니라 검찰까지 심판한 선거였다. 검찰정권의 출범으로 물 건너간 듯했던 검찰개혁의 시간이 다시 온 것이다. 검찰정권에서 검찰을 개혁하는 것은 문재인 정권 때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정권도 시민의 거듭된 저항 끝에 결국 무너졌다. 민주주의를 향한 꺾이지 않는 마음이 그 출발점이었다. 검찰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찰국가의 배신_에필로그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건을 이해할 때 정말 알아야 하는 본질 대신 사건으로 인해 발생했던 그 순간의 감정이나 사건의 간략한 기술로 사건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권의 책으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으며, 그것만으로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