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으로 노을이 흘러 들어왔다. 진우는 핸들을 움켜쥔 손등에 내려앉은 붉은 햇빛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역시 붉게 물든 서인의 옆얼굴을 보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그는 서인에게 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온통 붉기만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골드러시/ 서수진
표제작 <골드 러시>는 빛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낯선 타국으로 건너와서 불안하고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이렇다. 골드러시를 체험할 수 있는 상품인 '골드 러시'를 즐기기 위해 서인과 진우는 함께 차를 타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흙 위를 달리고 있다. 인적은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그 길에서 그들은 사고 다친 캥거루 한 마리와 조우한다. 캥거루는 무척 괴로워보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두고 가자는 진우에게 서인이 힐난한 듯한 말투로 대응하지만, 진우는 "그럼 네가 남아서 뭐라고 해보든가." 라는 말과 함께 차로 먼저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혼자 남게 되면 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캥거루를 위한 일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진우에게는 서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결혼 7주년을 맞이한 두 커플은 사랑하기 때문에 부부로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헤어질 수 없어서 그저 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 이 커플은 빛나는 미래를 설계하며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 비자 문제,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벗어날 수 없는 생활고, 그로 인한 피로와 고독, 마침내 권태와 파국으로 이어지는-은 그들에게 가득했던 희망을 소리없이 앗아갔다. 그렇게 7년을 살아가던 중, 서인이 여행사 프로모션 상품인 '골드 러시'를 예약했다. 지하 광산을 개조해 만든 숙소와 금광 체험, 사륜구동 렌터카가 포함된 상품인데 여행사 프로모션으로 반값 할인을 하는 상품이었다. 여행지로 가는 도중 그들은 조금 전의 캥거루와 조우한 것이었다. 애초에 오고 싶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일하고 있는 매장에 휴가를 내는 것도 서인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으니까. 결혼 7년 동안 이 커플의 삶은 메말라서 황폐해져갔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듯했다.
'골드 러시'라는 여행 상품은 둘의 만남과 결혼 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미장센처럼 보인다. 한때는 빛나는 금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금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몰락하고 황폐해져 폐광으로 변했고, 이제는 반값 할인으로 겨우 관광객들을 끌어모아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금광이 있던 자리. 서인과 진우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빛나는 삶을 꿈꾸었던 순간은 이방인의 고된 삶 속에서 무너져버렸고 이제는 관성으로 이어진 생활만이 남아있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해 호주에서 늘상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던 진우는 서인의 도움으로 소통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정작 서인과의 소통은 단절되어버렸다. 그렇게 보면, 진우의 소통 불능은 영어 실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폐광에서의 금광 체험을 하는 동안 가이드는 계속해서 천장의 돌을 만지면 무너질 수 있으니 만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했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주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진우는 그물에 감싸인 천장의 암석을 만지고 만다. 서인이 진우의 행동을 말리며 설명을 해준 다음에야 진우는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인은 가이드에게 진우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사과를 했다. 그때 서인은 "자신이 광산을 뒤흔든 것처럼, 그래서 광산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왔던 삶에는 가느다란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광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펼쳐져있었고, 그마저도 소통 불능으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걸, 소설은 이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이다.
빛나는 이름과 달리, '골드 러시' 는 빛을 거두는 방식으로 끝을 맺어간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우는 도로로 뛰어든 캥거루를 치고 만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캥거루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쇠막대로 캥거루를 내리친다. 캥거루가 살아있다는 서인의 말을 무시하고 쇠막대로 내리쳐서 캥거루를 죽인다. 그렇게 차를 달리다가, 진우는 정말 캥거루가 살아있었냐고 서인에게 묻는다. 대답하지 않는 서인과 함께 있는 차안으로 붉은 노을이 흘러 들어오며 차안을 가득 채운다. 그 방향 그대로 서있는다면 붉은 노을로 채워졌던 차는 시간이 흐르면서 검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제목과 결말과 미장센이 너무 제대로 맞아떨어져서 놀라게 된다. 차 안이 "붉기만 한 세계'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진우와 서인 커플의 삶과 '골드 러시' 여행상품과의 연관성이 얼마나 밀접한지, 소설의 플롯은 이렇게 짜야 하는구나, 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골드러시>에서 느꼈던 감탄은 <배영>에서도 다시 찾아오는데,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는 장면이 그러하다. 어둠 속에서 짧은 순간 가장 빛나는 불꽃을 발할 수 있는 폭죽을 우현은 거꾸로 들고 있다가 다리를 다치게 된다. 빨갛게 부어오른 다리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괜찮다고 말하고, 이를 지켜보던 여진은 그를 치료하기보다는 다른 폭죽에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밤바다를 걸으면서 우현은 말을 건네고 여진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장면은 빛나는 순간을 가지려다 오히려 상처만 입게 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게 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었나 봐.
우현이 옆으로 집어 던진 폭죽에선 계속 불꽃이 터져나왔다. 여진의 폭죽도 뒤늦게 불꽃을 토해냈다.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르는 그의 다리를 지켜보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이러다 나을 거야.
여진은 잠시 침묵하다 다른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을 다 써버린 후 밤바다를 따라 걸었다. 가로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모래사장의 어둠 속 여기저기에 연인들이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우현은 다리를 절뚝거렸다. 상처가 그새 거무죽죽하게 곪아있었다. 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우현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녀는 방향을 틀어 바다로 걸어갔다.
배영 / 서수진
《골드 러시》에 수록된 8편의 단편은 표제작 <골드 러시>처럼 한때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공유하며 함께 희망을 꿈꾸었던 연인들이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관계와 꿈이 무너진 후 빛바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영> <외출금지>와 같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며, 다른 한 축은 일평생을 성실하게 일해온 이민1세대의 고달픈 삶과 ‘차별’과 ‘편견’에 기대왔던 그들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 <캠벨타운 임대주택> <졸업 여행> <헬러 차이나> <한국인의 밤> 등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승수는 텅 빈 식당에 앉아 채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단단히 움켜쥐었다고 믿어온 성취를 곱씹었다. 식당은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냉면 얼음은 녹아버렸고 국물에는 기름만 둥둥 떴다. 냉장고 안의 고기는 부패하고 있었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이룬 것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졸업 여행/ 서수진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서수진의 첫 번째 소설집 《골드 러시》에는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표제작인 ‘골드러시’와 미발표작 ‘졸업여행’을 포함해 작품 8편이 수록되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가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실패, 자기 혐오, 자기 모순, 정체성 혼란과 같은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나은 삶, 빛나는 삶을 희망하며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러한 순간은 더욱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희망을 품고 그려냈던 꿈의 세계는 멀어져가고, 빛이 들지 않는 끝없는 어둠 혹은 인적 없는 흙길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 갑작스러운 붕괴(폐광처럼)나 돌연한 출몰(캥거루) 등으로 인해 그동안 지나왔던 삶의 궤적이 소멸되거나 방향이 완전히 틀어져버릴 수도 있으니.
타국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지만, 소설 곳곳에 나오는 소통 불능 혹은 소통 부재이라는 요소는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낯선 곳에서 그로 인한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오겠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가 배경인 고국에서도 그로 인한 배제나 불화는 늘 존재한다.
소설집의 가장 처음에 실린 단편 <입국심사>에서 유미는 서울 녹사평에서 만났던 미군 출신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입국심사 과정이 만만치 않다. 유미는 자신이 미군 출신 남자친구 에디와 진지한 관계임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사관이 원하는 것은 둘의 관계가 진지하지 않고 진전되지 않는 것이었다. 심사관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한 순간, 유미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입국심사관에게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한국인 유미가 미국에 눌러앉게 되는 경우의 수였다. 유미는 서명을 했고, 심사관은 에디에게 전화를 걸어 유미와 결혼할 거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에디의 대답을 듣고 만족한 얼굴로 유미를 통과시켜준다. 그 과정에서 유미는 자신이 녹사평 미군부대에 놀러갔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 미군 남자친구에게 유미는 한국에 있을 때 잠시 알고 지냈던 타국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이방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계는 소통 불능 혹은 부재로 이어지며 "붉은 햇빛"이 가득 들어찬 삶을 언젠가는 만들어낼 것이며 한껏 부풀려놓았던 희망을 짓눌러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작을 함께 했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다. 마음의 형태와 방향이 변했을지라도, 누군가 아직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붉은 햇빛"이 무너져내리는 폐광의 전조가 아닐 거라고 자조한다. 아직 눈을 가릴 정도의 어둠은 찾아오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삶은 움직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