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에게는 최악의 날이 나에게는 일상이 된 지금, 나 또한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때로 불행해지고, 앞으로 약해질 것이며, 최악의 시간을 거쳐 언젠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을 안다. 삶이 유한하다는, 이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배우기 위해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는 여러 번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내 고향 한국에서 이 책을 접할 분들은 나처럼 가슴 아픈 순간은 건너뛰고 삶의 유한함만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전에 비해 지금의 한국은 물질적인 면에서 무척 발전했고 살기 편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만큼 편안해지지 못했다는 얘기를 여러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그곳 사정에 밝지 못하지만 여러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그곳 사정에 밝지 못하지만 여러 매체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불행하지 않을 것처럼,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살며 오로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한때 그랬듯, 삶은 결국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들어가는 글
작가가 '들어가는 글'에 쓴 문장 중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오로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간다"는 구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앞의 두 구절,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에 물음표를 그렸다. 평생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들의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속도에 모두 그런 이유를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속도가 붙어서 멈출 수 없는 기세로 달려가는 집단적 달리기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얼핏 그런 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한국의 집단적 달리기의 이유에 불안과 강박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불안하니까 강박이 생기고, 그러한 강박의 반복으로 인해 불안은 떠날 줄 모르고. 지금 아프고,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사회의 아픈 단면처럼 보였다.
물론 작가는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되새기자는 의도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소중하게 반짝이는 삶의 조각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간직하고 삶의 마침표를 잘 찍기 위한 과정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있다는 것도. 집단적 달리기에 붙이는 이유는 달랐지만, 결국 나도 작가도 삶의 조각들을 살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마음은 같다.
혹시라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 일상 중 어떤 하루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모습, 심지어 그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지루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p70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군사용 IT솔루션의 해외사업개발 업무를 하면서 12년 동안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레 삶의 회의가 찾아온 작가는 나이 마흔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떠나와서 최저시급을 받는 일을 전전하다가 이민 3년차, 마흔 셋의 나이에 캐나다의 응급구조사가 된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해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정부 보조가 없으면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사회적 약자이자 저소득층, 이민자였던 그는 이제 캐나다 온타리오주 렌프루 카운티 소속 공무원이자 파라메딕으로 채용되어, 사람들에게 사회공공서비스를 주고 있다.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나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평화롭고 살기 좋은 캐나다에도 여러 삶이 있으며 작가가 보는 삶은 대체로 안타까운 상황에 몰린 삶, 그리고 죽음을 앞뒀거나 죽음을 마친 사람들이 있는 삶이다.
괴롭고 안타깝고 슬프고 참혹한 현장을 자주 마주할수록 비극을 생각하는 삶으로 기울 것만 같은데, 작가는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갖기 위해, 혹은 더 갖거나 뺏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거 열심히 살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짜 중요한 것들을 챙기며 사는 법은 잊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다 똑같이 죽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 숨 쉬고 까닭에 쉽게 느끼지 못할 뿐 죽음은 삶과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인생길 바로 옆에서 함께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나가는 글
책을 읽으면서 방송에서 보았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캐나다의 표면 아래 어떤 삶들이 숨어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오래된 교회 건물의 지하 한구석에 판자를 얼기설기 세워 마든 방, 옷장 대신 커다란 쓰레기용 비닐봉지에 옷을 보관하고, 가구라고 해봐야 찢어지고 검게 때 탄 매트리스가 전부인" 그런 집에서 아빠를 살리기 위해 심장을 계속 누르고 있던 어린 딸의 모습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내를 벽난로에 대고 차고 밟아서 얼굴 윤곽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남편, 응급구조대에 전화를 건 상태로 권총 자살을 한 사람, 코카인에 취한 산모 옆에서 죽어간 조산아.. 그리고 수많은 사고와 죽음들.
생계 때문에 선택한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은 작가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다. 모든 죽음은 슬프고 최대한 멀리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삶이 유한하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반짝이는 평범한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는 일은 늘 어렵고 숨이 차다. 하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평범한 듯 작은 조각들이 흔들리면서 시간을 채우고 있다. 흔들리는 그 시간들 속에서, 가끔 반짝이는 조각을 발견하여 만질 수 있다면, 그런 순간들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준다면 사는 일은 조금 덜 어렵고 조금 덜 숨이 찰 수도 있다. 집단적 달리기를 하는 이유에 붙인 물음표를 떼어 버리고, 맹렬한 속도의 궤도에서 이탈해도 좋은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삶의 대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그런 감성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