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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완성하여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년도는 1856년이다. 올해가 2006년이니 정확히 150년 전의 일인 것이다.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대략적인 것만 설명하려해도 책 열권은 족히 필요할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의 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담 보바리>는 걸작이며,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골 의사에게 시집 간 허영심 많은 여자 엠마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다 가산을 탕진하고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500페이지에 가까운 작품의 스토리 치고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말마따나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상의 권태와 화려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엠마가 어떻게 정부들과 만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며, 파멸해 가는지 이 소설은 철저하고 어찌 보면 지독하기까지 한 심리 묘사로 그려낸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를 쓰는데 4년이 걸릴 정도로 문체와 스타일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물론 역자의 세련되고 꼼꼼한 번역의 힘도 컸겠지만, 150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은유나 직유, 문체가 전혀 세련된 빛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놀라웠다.

 

권태로운 일상, 화려한 것들에 대한 갈망. 불륜에 빠져드는 엠마의 심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충분히 대입이 가능하다. 15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일상을 권태로워하고, 화려한 삶을 갈망하며, 결혼 제도의 모순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불륜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결혼의 필요성과 해악성 사이에 부딪히고, 이성과 본능의 갈등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무수한 불행과 파멸은 인간은 역시 불완전한 존재라는 자조를 낳는다. 기술은 많이 발전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모순은 여전한 것이다. 인간의 약점과 추악함, 그리고 불완전성에 대한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철저한 이해를 담고 있는 <마담 보바리>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고, 생명력을 갖는다. 정부를 둘씩이나 갖고, 선량한(어찌 보면 좀 멍청한) 남편과 집안을 파멸시킨 엠마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여자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듯, 함부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엠마로서는 나름대로 자기의 모순을 걷어내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간에.

<마담 보바리>가 던지는 이러한 테마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진지한 문학을 즐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앞부분은 좀 읽기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 인내심을 갖고 읽어본다면 엠마의 파멸상을 쫓는 과정과 그 묘사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번역 또한 깔끔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세계 명작 뒤편에 실린 작품 해설 같은 건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간혹 해석을 너무 한방향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해설도 있기 때문에) 김화영 씨가 쓴 해설은 작품을 이해하고 그 의의를 ƒ틈莩쨉?큰 도움을 준다. 작품을 다 읽고 시간을 두고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비도덕성과 음란성을 이유로 플로베르는 고발을 당했다고 한다. 변호사 쥘 세나르의 변론으로 다행히 무죄혐의를 받고 이 소설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마담 보바리>는 불륜의 과정과 심리를 치밀하고 생생하게 그리지만, 요즘 나오는 불륜 소설에 비교해보면 얌전하다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대목은 없다. 150년 사이에 불륜 소설이 거짓말 안보태고 정말 산더미만큼 씌여졌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고 있을 것이다. 150년 전이었다면 머리에 총을 맞았을, 적나라한 묘사를 달고서. 하지만 정말 그런 소설들이 불륜의 본질을 꿰뚫고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표현의 자유가 꼭  작품의 본질과 연결되는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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