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dlalstjd7701님의 서재
  • 외꺼풀
  • 데브 JJ 리
  • 17,100원 (10%↓950)
  • 2024-08-13
  • : 23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영상은 1,080P 화질로도 부족하다. 아마 내가 모르는 고화질의 단계가 더 있을 테지만,

내가 아는 최고의 화질은 고작 1,080P가 전부다.

그보다 낮은 화질로 무언가를 본다면,

720P는 정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뭔가 이상하다 정도 말할 수 있을 테고,

480P는 희뿌연 필터를 끼고 보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 이하는 눈이 아플 정도니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할 테고.

​

한 마디로 낮은 화질로 본다는 행위는 곤욕이다. 뚜렷하게 보여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보고자 하는 대상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면? 삶을 살아간 다는 게 마냥 좋은 일들의 연속이 아니라는 건 중학교만 올라가도 알게 되는 사실이니 말이다.

심지어 그 세상이 낯선 타국의 땅에서 나 홀로 외로이 버텨내야 하는 곳이라면, 삶의 무게는 지독히도 버거울 만하다.

​

데브 JJ 리의 그래픽 노블 《외꺼풀》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성장담이다.

3살 때부터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겪게 되는 삶의 풍파를 읽고 있으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는 나이브 한 생각도 들지만,

누군가는 사소하게 밟고 지나가는 낙엽 같은 순간들이, 누군가에겐 정치 쿠데타 같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선 선택의 연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런 소년, 소녀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꽤나 한심해 보이겠지만 말이다. 그때의 그들은, 진심이니까.

​

주인공 데브라는 좀 더 진심이었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든, 다소 불우했던 엄마와의 관계든,

데브라에게 삶은 전쟁터였다. 클리셰적인 메타포지만, 정말 그랬다.

다만, 데브라에게 있어서 이 전쟁터에서의 목표는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적군도 아니고, 탈환해야 할 진지도 아니다. 데브라에겐, 한 명의 아군인 동료만이 필요했다.

둘 이상의 복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케이트와 퀸을 동시에 마음에 품지 못하는 것처럼.

단 한 명의 동료만 곁에 있다면, 그곳이 들쥐들이 덤벼드는 참호 속이든, 낯선 쌍꺼풀들이 즐비한 파티 장소이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오케스트라 부 연습실이든 상관없다.

그는, 단 한 명의 동료와 함께여야만, 용감해질 수 있으니까.

​

책의 결말을 다 읽고 나면, 데브라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데브라는 이제 한 명의 동료가 없더라도 전쟁터를 걸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외꺼풀이 사라졌다고 쌍꺼풀들의 속에서 어울릴 수 있을까?

쉽사리 답을 내리지는 못할 것 같다.

어른이 된 단 한 컷의 데브라의 모습만으로는, 그녀가 행복한지, 우울한지,

모든 고난을 겪고 나서 해탈한 경지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마치 480P의 낮은 화질로 바라보는 뿌연 영상처럼.

​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보기 싫은 것들도 모두 또렷한 고화질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보아야만 할까?

그건 좀 피곤하지 않을까?

하나의 꺼풀만이 들어 주는 눈두덩의 표피만큼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가.

보다 낮은 화질로 세상의 창을 연결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까.

​

화질이 낮다면, 보기 싫은 것들을 보더라도 덜 힘들 테고,

보고 싶은 것들은 뿌연 필터 덕에 그 잔상이 더 오래가지 않을까. 다만, 떠오를 때마다 그 모습들이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

심리학에서 말하는 삶의 거리 두기나 메타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삶의 화질은 낮출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갈 건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내 과거의 일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심 어린 사과도 그때야 나오지 않을까.

​

*창비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