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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lstjd7701님의 서재
  • 외꺼풀
  • 데브 JJ 리
  • 17,100원 (10%950)
  • 2024-08-13
  • : 599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영상은 1,080P 화질로도 부족하다. 아마 내가 모르는 고화질의 단계가 더 있을 테지만,

내가 아는 최고의 화질은 고작 1,080P가 전부다.

그보다 낮은 화질로 무언가를 본다면,

720P는 정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뭔가 이상하다 정도 말할 수 있을 테고,

480P는 희뿌연 필터를 끼고 보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 이하는 눈이 아플 정도니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할 테고.

한 마디로 낮은 화질로 본다는 행위는 곤욕이다. 뚜렷하게 보여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보고자 하는 대상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면? 삶을 살아간 다는 게 마냥 좋은 일들의 연속이 아니라는 건 중학교만 올라가도 알게 되는 사실이니 말이다.

심지어 그 세상이 낯선 타국의 땅에서 나 홀로 외로이 버텨내야 하는 곳이라면, 삶의 무게는 지독히도 버거울 만하다.

데브 JJ 리의 그래픽 노블 《외꺼풀》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성장담이다.

3살 때부터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겪게 되는 삶의 풍파를 읽고 있으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는 나이브 한 생각도 들지만,

누군가는 사소하게 밟고 지나가는 낙엽 같은 순간들이, 누군가에겐 정치 쿠데타 같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선 선택의 연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런 소년, 소녀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꽤나 한심해 보이겠지만 말이다. 그때의 그들은, 진심이니까.

주인공 데브라는 좀 더 진심이었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든, 다소 불우했던 엄마와의 관계든,

데브라에게 삶은 전쟁터였다. 클리셰적인 메타포지만, 정말 그랬다.

다만, 데브라에게 있어서 이 전쟁터에서의 목표는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적군도 아니고, 탈환해야 할 진지도 아니다. 데브라에겐, 한 명의 아군인 동료만이 필요했다.

둘 이상의 복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케이트와 퀸을 동시에 마음에 품지 못하는 것처럼.

단 한 명의 동료만 곁에 있다면, 그곳이 들쥐들이 덤벼드는 참호 속이든, 낯선 쌍꺼풀들이 즐비한 파티 장소이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오케스트라 부 연습실이든 상관없다.

그는, 단 한 명의 동료와 함께여야만, 용감해질 수 있으니까.

책의 결말을 다 읽고 나면, 데브라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데브라는 이제 한 명의 동료가 없더라도 전쟁터를 걸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외꺼풀이 사라졌다고 쌍꺼풀들의 속에서 어울릴 수 있을까?

쉽사리 답을 내리지는 못할 것 같다.

어른이 된 단 한 컷의 데브라의 모습만으로는, 그녀가 행복한지, 우울한지,

모든 고난을 겪고 나서 해탈한 경지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마치 480P의 낮은 화질로 바라보는 뿌연 영상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보기 싫은 것들도 모두 또렷한 고화질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보아야만 할까?

그건 좀 피곤하지 않을까?

하나의 꺼풀만이 들어 주는 눈두덩의 표피만큼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가.

보다 낮은 화질로 세상의 창을 연결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까.

화질이 낮다면, 보기 싫은 것들을 보더라도 덜 힘들 테고,

보고 싶은 것들은 뿌연 필터 덕에 그 잔상이 더 오래가지 않을까. 다만, 떠오를 때마다 그 모습들이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삶의 거리 두기나 메타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삶의 화질은 낮출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갈 건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내 과거의 일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심 어린 사과도 그때야 나오지 않을까.

*창비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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