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나』 속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간 곳은 제각각이지만, 떠난 이유는 비슷하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방점은 '드림'에 찍혀 있으니, 갈 곳이 굳이 '아메리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드림은, 꿈은 대체 무엇일까. 왜 그들은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그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것일까.
… 나중에 그 자리를 떠나며 이페멜루는 디케를 생각했다. 디케가 대학에 가면 ASA(아프리카인 학생협회)에 참석할까, BSU(흑인 학생회)에 참석할까. 남들은 그를 미국계 아프리카인으로 생각할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생각할까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되레 남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선택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아메리카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소설이다. 인간이 어떤 색깔의 피부를 가지든,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어떤 언어를 쓰든 간에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과연 정체성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 말이다. 정체성이 있는 인간과 없는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외력에 견디는 내력의 유무일 것 같다. 그러니까 외력이 가해질 때(그것이 개인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개인의 내부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내력이 있는 인간은 흔들릴 수는 있어도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주저앉기는 하더라도 그게 끝은 아닐 것이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페멜루에게 정체성은 헤어스타일일 수도 있고, 남들이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이름일 수도 있고, 자기 언어로 하나하나 써 내려간 블로그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 같다. 이페멜루는 사랑의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갔다. 쌓인 정체성이 때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벽의 역할을 하며 방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결국 아다치에 작가가 생각한 정체성은 외부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온전한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타향이라면,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흔들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내력일 것이다.
… 이페멜루는 훗날 알게 될 것이다. 킴벌리의 눈에 빈민들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가난은 빛나는 것이었다. 가난이 빈민들을 성스럽게 만들어 줬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사악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인은 외국인 빈민들이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의 성장을 『아메리카나』에서도 할 수 있을까. 성장통이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그러므로 아픔의 값만큼 성장의 값이 결정된다는 말이라면, 이페멜루에게 우리는 함부로 성장통이라는 말 할 수 없다. 이페멜루가 미국에서 겪었던 고통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그 덕에 네가 이렇게 성장하지 않았냐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고통을 가하는 구조를 탓하지 못하는 비겁함이다. 고통의 가해는 외면한 채, 고통의 피해만 신성시하는 모순이다. 마치 킴벌리처럼.
… "제 생각에 이 나라의 계급은 사람들이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자기 위치를 알죠. 심지어 계급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미국으로 갔던 이페멜루는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의 악센트를 쓰며, 공들인 땋은 머리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간직한 채 말이다. '나이지리안'으로 미국으로 간, 이페멜루는 '아메리카나'가 되어 미국에서 왔다. 낯선 것이 익숙해졌고,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졌다. 이페멜루는 아직도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문을 열고 타인을 맞아들이는 결말은 지독히도 흔들렸던 수많은 사실들을 독자들이 알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비록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의 프란시스의 접힌 이름이 주는 뭉클함은 덜하지만.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들에 당연하지 않다고 분노하며 부딪쳐 온 이페멜루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현실에 안주했다고 지적할 수 없다. 결국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그저 그런 나이지리아 여성의 삶을 사는 것 아니냐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페멜루'가 돌아왔으니까 말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을 차용했다).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아." 이페멜루는 고개를 저으며 차창 쪽으로 돌렸다. 우울증이란 모든 것을 병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미국인들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P267
그는 나이지라아에 가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런 온라인 그룹의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서는 사소한 의견도 금방 가열되어 비난으로 돌변하는가 하면 인신공격이 오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페멜루는 글쓴이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미국의 허름한 집에 살면서, 일만 하며 죽은 듯이 사는 나이지리아인들. 그들은 열심히 모은 저금을 간직했다가 12월에 일주일 동안 고향에 돌아갈 때 쓰는데 그때 신발과 옷과 싸구려 손목시계로 가득한 여행 가방을 몇 개씩 들고 도착하면 친척들의 눈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인터넷에서 고국에 대한 속설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설전을 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 고국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흐릿한 추상적 공간이 되었고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자신이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