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리도 인생이 절절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어찌 이렇게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들풀의 구원>은
상실과 고통의 순간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이자 정원사이자
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자연의 회복력과 생명력"
각 소제목마다 앞부분에 풀을 소개하는 글이 있다.
들풀의 약성과 영적인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구절에는 자연의 회복력과 생명력이
담겨있다.
잔쑥차는 현세와 다른 차원의
세계 사이의 소통을 돕는다(69쪽)
장미는 우리가 진정한 힘을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기쁨과 고난이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210쪽)
유럽미역취가 자라는 곳에는 숨은
보물이 있다(279쪽)
정원에 한련을 심으면 자신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준다(318쪽)
산수레국화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과
순환하는 생의 충만함을 상징한다
(415쪽)
저자의 자연에 대한
깊은 인식과 통찰력으로
결국 슬픔을 안고 나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자연과의 교감 "
<들풀의 구원>에서 아이와 저자의 대화에는
감동적인 순간이 담겨있다.
<씨앗 3. 삶이 우리를 진흙탕으로 이끌 때>
이 장에는 아이의 당뇨병 판정, 어린 시절의 아픈 과거, 떠난 이에 대한 애도,
부모님께 외면당한 순간 등
너무 아프고 버거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읽어내기 힘겨웠다.
아이를 맹세코
지키겠다는 다짐이 아이의 질병으로
무너진 순간,
아이는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장풍으로 와르르 쓰러뜨리는
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제 다시 쌓는 거야.
엄마도 같이 해도 되는데,
할래?"
들풀의 구원 209쪽
저자는 아이와 함께
다시 탑을 쌓고
텃밭 거름을 층층이
쌓아가며 내년을 준비한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일을 마친 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우리 작품을 바라본다.
팔은 아프고 온 데 똥을 뒤집어썼지만
우리는 활짝 웃고 있다.
구경꾼에게는 두룩이 솟은 땅일 뿐이겠지만, 우리는 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이 속에서는 물질이
섞이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
우리는 정원의 연금술사이고, 이것은
우리의 금이다.
들풀의 구원 225쪽
아들과 함께 <정원의 연금술사>를
자부하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에게 고통 속에서
고통에 빠져있기보다
움직여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라. 말하는 거 같았다.
농업박람회에 참여하여
창의성, 장소성, 실천적 원예 교육으로
극찬 받으며
<가장 창의적인 정원 상>을
수상한 꼬마 정원사와 저자.
분주하였던 승리한 날에 아이의
기쁨과 미소 짓는
어린 시절의 저자도 마음 안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아이와 자연과 함께 하며
점점 그 생명력으로 치유받는 저자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치료도 약물치료도 아닌
그저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
작은 정원을 가꾸는 일로
시작되었다.
"가슴에 파고드는 문장력"
우리는 구근 하나마다 희망을 하나씩 심는다. 꽃을 피우는 구근이 하나 있다면 썩어버리는 구근도 하나 있다는 것, 싹을 틔우는 씨앗이 하나 있다면 엘더나무에서 기다리는 새들이 먹어버리는 씨앗도 하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다면 그냥 심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라리라고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은 한 단위의 기쁨과 한 단위의 슬픔으로 이뤄진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행복의 봉우리란 없고,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도 없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어지럽고 끔찍하고 아름다운 삶뿐이며, 나는 이 삶에 감사한다.
들풀의 구원 417쪽
삶 속에 슬픔과 고통을
떨쳐내기보다 한 발짝 물러나 무심히 바라보며 품고 나아가는 것을 강조한 듯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몸부림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그리고 그 삶에 감사하면 될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월든>을 읽을 때
저자 소로우의 글과 번역 글의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영문 월든을 본 것은 아니지만)
<들풀의 구원> 역시
저자의 원본을 본 적 없지만
역자 김명남이 풀어낸 번역은
감히 저자의 글과 찰떡같다는 믿음을
주었다.
<들플의 구원>은
고통과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무던해지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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