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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 8,550원 (10%470)
  • 1997-04-10
  • : 4,682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나는 나의 생을 허락한 일이 없다. 죽음 또한 나의 허락과 무관할 것이다. 이 명제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나의 존재와 소멸에 관여할 수 없다. 이토록 두려우면서도 허망한 사실은 우리를 송두리째 붙들고 있다. 그래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이다.˝ 라는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낯설지 않다. 

세상은 너무나 두껍게 닫힌 채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는 끊임없는 선택과 행동을 강요한다. 강요는 구원을 전제하지 않으며 오로지 짊어져야 하는 책임만 있을 뿐이다. 죄 없이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운명의 노예임을 실감케 한다. 그래서 두꺼운 바위 앞에서 끊임없는 사역을 강요받는 시지프의 운명은 인간을 대변한다. 

이런 잔인한 진실을 벗어나고자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하려 노력했다. 이성의 노력이다. 그러나 이성의 노력은 세상을 그저 관념적으로 변화시킬 뿐이다. 세상을 향한 인간의 정의는 고작 들짐승의 영역 표시와 다르지 않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관념적 노력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희망을 기대한다. 그러나 희망은 미래를 상정할 뿐이다. 희망이 오지 않은 오늘은 희망이 있을 내일을 향한 교두보일 뿐이다. 그렇게 매일은 가진 의미보다 적은 의미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삶을 기만할 뿐이다. 희망에는 구원이 없다. 

마지막으로 자살을 고민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인 자살은 더 이상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는 자기 고백에 불과할 뿐이다. 간절한 고백에도 구원은 없다. 

카뮈는 이런 헛된 노력들이 사실은 잔인한 운명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일 뿐임을 시사한다. 그는 숨막히게 냉정한 삶의 의미를 넘어 자유를 찾기 위해 "순종" 할 것을 이야기한다. 역설적이게도 순종만이 잔인한 진실을 뛰어넘을 힘이다.

카뮈가 말하는 순종은 굴종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고, 모호하고, 휩쓸고, 집어 삼키는 거대한 운명에 순종하는 것은 운명의 잔인한 본질 또한 온전히 나의 것임을 인정하는 주인의 태도를 역설한다.

그때야 비로소 나의 소관이 아닌 운명과 부둥켜안고 대결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은 산정 반대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시지프의 뒷모습이다. 무의미하고 덧없어 보이는 시지프의 걸음은 그렇게 투쟁과 창조의 행위로 거듭나게 된다.

죽음은 정해져 있고 삶은 놀랍도록 의미가 없다. 보통 의미가 있는 것은 가진 의미 이상이 될 수 없기에, 덧없고 의미없는 실존의 본질은 무한한 가능성의 방증이다. 우리는 실존에 순종하며 놀랍도록 많은 가능성을 허락받는다.

무의미한 승리의 가능성 속에서 끊임없는 운명의 도전과 맞서는 인간의 순종적인 반항은 어제와 또 다른 자신을 재창조하는 예술이다. 이것 만으로 인간을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카뮈의 확신에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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