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이론은 천재 담론 철학가 푸코의 이론에서 큰 착안점들을 얻어 다듬어지고 완성됐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서로 모순되고 맞지 않는 푸코의 단점들을 고스란히 떠안고 피해망상적으로 변질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얼핏 문제 없어 보이는 이 사회의 모순점들을 끄집어내 비판하는 걸까?
예를들어, 페미니즘 이론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마초적인 강한 남성의 모습은 여성 차별적이라고 할 수있지만, 여기서 반작용으로 나온 신남성(New man)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여성 차별적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강한 남성의 모습이나, 거기에서 나온 신남성의 모습이나 결과적으론 마초니즘을 배경으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즉 근본적 전제가 배경으로 깔려 언술들을 재생한 한다는 것이다.
그 근본적 전제란 남성은 더 우월하고 여성은 하등하다는 언어속에 내제한 심층 의식이다. 여배우라는 말도 여성차별적이고, 남간호사라는 말 또한 여성차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은 여기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있다.
나는 그저 아무생각없이 한 말일 뿐인데 페미니스트로부터 미소지니스트라며 공격을 받는다 생각이 들 때면 항상 이 이론 때문이라고 여기면 된다.
결국 이 사회적 담론들의 배경은 남성중심적이고, 이 담론들로부터 재생산 된 언술들 또한 근본적으로 여성차별적이기 때문에 여성은 항상 억압받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것이 페미니즘이론의 기둥이다.
그래서 이것이 사실이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푸코의 이론들은 이따금씩 서로 모순되는 모습을 보여 여러 사회학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것은 푸코 본인도 인정한 바 이다. 이 그늘은 푸코의 천재적인 발상들로 가려질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이 모순되는 푸코의 이론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골라 사용했기 때문에 더더욱 모순적인 모습을 띈다. 어떻게 그럴까?
설명하기에 앞서 이 예시는 어디까지나 국내에 존재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만 적용되는 사안으로써 오해가 없길 바란다)
군대 문제를 예를들어, 몇몇 시민들이 남성만 군대에 가는 것은 헌법에 위배가 된다며 헌법소원을 걸었다. 실지로 남성만 군대를 가는것은 매우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발상이다.
몸에 장애가 있는 남성도 공익으로 빠지는데, 여성은 이 장애인보다도 업무 수행능력이 부족해 보호받아야만 하는 대상이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소리다. 여성은 엄연히 성숙한 시민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에서는 그 사안을 몇번이나 기각했다. 심지어 헌법재판관들은 죄다 남성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일단 배경 설명을 하자면, 예로부터 '정치'와 '국방'에 관련된 담론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독점적 소유물이었으며, 마초니즘의 상징적인 매체였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때 군대라는 남성만의 배타적 공간에 여성이 참전하고 나서부터 여권이 급격히 성장한 것으로 봐서, 국방과 정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민으로서의 존엄성에 있어서 대단히 상징적이고 강력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당수의 선진국 국가들은 여성들이 직접 능동적으로 국방에 참여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저항의 역사에 따라 ,상식적인 페미니스트라면 법조계가 여성의 국방의 의무 참여를 가로막은 이 작고의 사태에 대해 온 몸으로 시위하며 자신들의 존엄성을 주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했고, 오히려 열을 내는 것은 전형적인 남성들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이 책에 나온것처럼 남성들을 군무새라고 비난하고 조롱하거나, 의무보다 자신들의 권리가 더 소중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담론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번째, '여성주의' 라는 이론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해 그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의, 또는 그 이상의 선시민들의 의식에, 언어에 뿌리내려 새로운 의식을,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있으며,
두번째로는, 점점 더 자본주의 사회로 흐르면서 하나의 상징이 나타내는 명예나 정당성 그리고 정의 보다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권익이 우선되는 구조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현재 여성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며 , 여성단체는 국방의 의무 수행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점점 더 큰 영향을 뻗치려고 하고 있으며,
남성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국방의 긴밀한 관계와 상징성 속에서도 더 이상 국방의 의무 수행에 자부심과 경외심을 갖지 않고있다.
즉 요약하자면, 예전에 피부에 실질적으로 와닿았던 여성차별적 요소가 이제는 이익관심과 심층 담론의 변동에 따라 정의와 상징의 껍데기만 남고 순전히 이익다툼의 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담론은 끝없이 변화해, 하나의 권력이 오랜 기간동안 독재적으로 언술들을 지배한다고 볼 수 없으며, 비상식적인 담론에 저항해 다른 권력을 대치 시킨다고 해서 그 권력이 항상 정의롭고 상식적으로 적용된다고 보기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의 담론을 권력으로써 내세우는 이상, 그것은 끊임없이 그것에 맞는 언술들을 재창조해내며, 편향되고 비논리적인 결과를 도출할 위험에 노출될수있다.
신남성이라고 해서 영원히 마초니즘을 배경으로 그 목숨을 유지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항상 정의와 차별의 해소를 반영할 수는 없다. 성차별적이라 여겼던 여러 현상들이 항상 성차별적일 수는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현실을, 담론의 권력의 무시무시함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허구의 논리를 창출한다. 페미니즘은 언제까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피해망상적인 행동을 할 것인가? 그런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여러가지 의미로의 페미니스트로써 페미니스트들이 진정 자유롭기를, 더 성숙한 시민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추가적으로, 더 성숙하고 통합된 시민 사회를 원한다면 토론 당사자들이 상식과 보편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말꼬투리 잡기와 논점흐리기로 무장해 상대의 주장을 공격적으로 꺾기만을 종용하며, 기득권자에게 대답할 의무가 없다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시민 사회의 토론을 부정하고 상식적인 의사소통을 단절한다면 어떻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퀴어 축제를 예로 들자면, 동성애자들이 진정으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고 싶다면 동성애와 관련해서 당연히 사회적인 인식개선과 합의, 총체적인 담론의 운동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들은 억압받고 있는 성을 알리고 해방하기 위해 동성애 퍼레이드를 한다고 주장하며 일반적인 시민들의 상식과 도덕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극히 혐오적인 행동을 조장하고 있다.
이것은 동성애자들 스스로 반대파의 혐오 담론들을 능동적으로 생산하길 부추기는 자살행위일 뿐 더러, 사회적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패는 범사회적인 민폐 행위라 볼 수 있다.
담론은 개인과 사회간, 개인과 개인간, 사회와 사회간의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운동으로서, 결코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단순 일렬 수직적구조(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처럼)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보편적 시민을 단순히 적으로 상정해 싸움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숭고한 사회 운동이라기 보단 순전히 길거리 양아치의 협객 정신 정도로 밖엔 느낄 수 없다.
가히 아직까지 멀쩡히 잘 살아있는 하버마스 선생께서 통곡을 하며 급히 뒷목잡고 쓰러질 일이다.
물론 선동은 전혀 나쁘지 않다. 선동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변에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유용한 도구가 된다. 집에 불이 붙었는데 불 끄러 가는 사람들 머리카락이나 세고 있는 태평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보편적 시민의 도덕성을 합리적으로 이해 시키지 못하고 걸맞는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 공적인 담론을 향해 발돋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선동다운 선동' 수준으로 남게 된다.
선동을 위한 선동으로 남아 재야에 소리 소문 없이 묻히게 되는 것이 페미니즘이 진정 원하는 길이라면, 지금 하는대로 계속 나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마 기득권의 프레임을 쓴 강자들도 뒤에서 그것을 박수치며 응원할 것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나 또한 한 때 페미니즘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단호하게 말할수 있다.
"페미니즘 이론은 통계를 포함해 대부분이 허구의 논리이다!"
나의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토론 자세를 가진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나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좋다.
나는 마음속이 쥐구멍 보다도 더 옹졸한 이 책의 저자와는 달리, 토론에 있어 항상 열려있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상식적인 시민이고, 보편적인 시민이다. 분노에 눈이 멀어 인간성을 잃지 말도록 하자.
알라딘!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인간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책을 유통하는 업체가, 오히려 인간성을 말살시키기를 종용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