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에서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시기를 읽으며 그들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면, 이 소설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인 메모리엄”/도서제공 다산북스에서 보내주셨습니다.
“무릎 위에 교지 ‘더 프레슈티언’을 올려놓은 곤트는 동창에게 바치는 추모의 글을 끝까지 읽었다. 전사한 아홉명 중에서 곤트가 아는 사람이 일곱명이었다. 엘우드의 친구의 형, 클래런스 로즈비어를 추모하는 글이 가장 길었다. 곤트의 친구이자 적수였던 커스버트-스미트는 한 문단이면 충분했다. 두 청년 모두 용감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았다고‘더 프레슈티언’은 전했다.”
기숙학교를 바탕으로 소년들의 관계로 시작하지만 교지에 추모글이 실려야 할 정도로 전쟁의 영향이 그들에게 미치는 중입니다. 학교에서조차 안전하지 않습니다. 옥스퍼드에서 고전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던 주인공은 삼촌이 독일첩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자, 전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죠.
헨리는 남성이 가진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상징 캐릭터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지만 흰 깃털을 받는 모욕을 참을 수는 없고, 엘우드를 사랑하지만 작별인사도 없이 전쟁터로 떠납니다. 그 가 겪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한 남성의 성장과정이기도 하고, 소년기의 이상향이 거세되고 다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만 남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수용소나 전장에서 표현되는 그의 감정변화가 전쟁을 겪지 못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들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냥 전쟁이 나쁘다라고 피상적으로 느끼는 것과, 한 청년의 경험을 따라가는 것에는 차이가 크죠.
시드니는 예술가가 가진 정체성의 혼란 그자체입니다. 유대인인 자신을 부정하는 설정도 그렇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상대에게 선택을 넘기는 행동표현도 성장하고 싶지 않고 현재를 살고 싶은 피터팬같은 그를 드러내죠. 그가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의 광폭함은 슬픔을 견뎌내 무뎌진 한 인간을 보여줍니다. 저는 사랑에 망설이지 않는 시드니 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야기 인가? 하면 전쟁의 참혹함이 두드러지고, 그렇다고 다큐라고 보기에는 서정적입니다.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이 때문인 것 같고요. 스포일러를 잘 안하는 편이지만 아름다움을 가졌던 시드니가 눈을 잃은 부분은 가장 중요한 것을 삭제당하고 어른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고 할까요.
“다툼은 길지 않았다. 엘우드는 항상 사과했고 곤트는 항상 용서했다.”
전쟁이 갈라놓았던 그들이 다시 만나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부분. 그리고 1919년 3월 31일의 더 프레슈티언이 먹먹해서 완벽한 엔딩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맨스로 분류하기로 했습니다. 해피엔딩이니까요. 퀴어키워드가 불호라도 역사적 사실이 촘촘해서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고 적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