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리적 딜레마' 라는 주제애 관해 김연수 작가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딜레마에 대해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진다.
먼저 김연수 작가의 「우리들의 실패」에서의 질문을 들어가본다.
간절히 원하던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들의 실패」 에서 두 남녀가 나온다. 남자 손동하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와 함께 살았다. 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병마는 끝내 엄마의 삶을 앗아갔고 엄마와 함께 벗꽃을 걷자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손동하의 삶은 끝내 그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검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해야 한다.
소녀가 있었다. 손동하의 친척과 재혼한 정혜인. 그녀는 아빠를 잃고 엄마가 재혼한 새아빠를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의 행복을 위해 재혼을 받아들인다. 두 사람 모두 원하지 않았다. 엄마의 재혼을 받아들였건만 엄마는 결국 새아빠와 헤어지고 둘은 연락이 끊긴다.
그토록 바라고 기도했건만 미래가 내 생각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진중한 질문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의 이야기로 인용한다. 자신이 나무에 갇힐 운명인 줄 알면서도 그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멀린. 그는 왜 미래를 알고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그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의 예를 든다.


처음 본 악보를 연주하는 음악 용어 '초견'.
우리 모두의 인생 또한 '초견'이다. 우리는 늘 하루 하루 초견의 삶을 살고 있다. 내일은 또 안 가본 미래니까.
모든 게 완벽하게 연주하면 좋겠지만 한 번 뿐인 초견을 무사히 해내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의 초견을 완성한다. 비록 우리의 미래가 원하지 않는 미래로 다가올지라도 말이다. 그 고통을 장자의 도덕경의 문구처럼, 결국 초라해지고 만 마법사 멀린처럼 그 삶을 끝까지 견디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걸 이 소설은 말해준다.
그러므로 소설 속 손동하의 삶은 실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가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래도 살아났으므로. 비록 검찰에 잡힐 처지라 하더라도 끝까지 연주하기로 결심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경하던 사진 작가 사카키 미노루의 유고전을 준비하던 중 존경하는 사카키 미노루가 미성년자의 나체를 찍은 작품을 발견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 미성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래된 일 같으니 그냥 눈 딱 감고 넘어가야 하는가. 특히 이 전시회는 유고전인지라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이미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간 상태이다. 아니면 엄격한 기준으로 부도덕함이 발견된 작가의 작품을 이대로 마무리지어야 하는가.
김연수 작가의 질문은 보편적인 삶의 질문을 던진다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질문은 굉장히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적인 윤리의 척도를 물어본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히라노는 누가 선하고 부도덕한지 비판하지 않는다.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말해주기 떄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입장을 달리하면 결국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사카키 씨는 '이처럼 무엇이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사진도 없다'고 말했다. 애초에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사색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어 어느 지점에 닿았을 때 그 표정이 나타났는지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연수 작가와 히라노 게이치로 두 거장의 만남은 옳았다. 인간의 삶의 본질을 파헤치며 그 삶 속에 겸손하도록 한다. 내게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소설들이 두고두고 떠오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