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당연한 말이다.
한국에서 '죽음'은 금기어다. 사람들이 아무리 '죽고 싶다고' 말한들, 노인들이 '늙으면 죽어야지'라며 말해도 그 말들은 습관적인 한탄으로 받아들일 뿐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 무례라고 생각하기에 '죽음'이라는 건 힘써서 피할 주제이기도 하다. 반면 역으로 생각하면 정말 '죽고 싶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을 나눌 사람들이 없다. 이제 삶을 끝내고 싶지만 모두 이 주제에 대해 피하려고만 하니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곳이 없다. 그 사람들에게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야기하지 못하니 더 죽을 맛이다. 조경아 작가의 소설 《안락정원》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안락정원》 의 테오는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실려온다. 그의 목적은 한 가지다. 그를 '안락정원'에 인도할 김수복 경위의 눈에 띄는 것. 그래서 베일에 감싸인 '안락정원'에서 사라진 동생 테린을 찾는 것이다. 다행이 테오는 안락정원 입주에 성공한다. 안락한 죽음을 제공해주는 곳. 그 곳에서 동생의 소식도 알 수 있고 자신도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곳에 입주는 하였지만 규칙이 테오의 발목을 잡는다. 함께 식사도 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한다. 2층에 있는 '라파엘 정신건강의학과'에 정기적인 상담도 받아야 한다. 죽으러 왔지만 죽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과연 테오는 생각처럼 이 곳에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죽음'을 쉽게 이야기하면서 두려워 하는가. 사람들은 '죽음' = '끝'이라는 공식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중차대한 범죄도 공소권 없음으로 끝난다. '나'만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되어지리라 믿으며 최후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과연 끝인가? 나는 끝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끝인가?
죽기 위해 찾아온 테오는 안락정원의 사람들과 부대끼는 생활을 하며 자신의 삶을 현미경으로 돌아보게 된다. 가족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엄마와 사라진 동생 테린. 현미경으로 바라본 자신의 삶은 구질구질하다. 이런 것도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소설 《안락정원》 은 이 질문에 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다 괜찮아질거야'라는 피상적인 위로가 아닌 실제적인 조건이 갖추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한다. 그 환경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의사와의 정기적 상담, 실질적 도움을 주는 밀착케어, 노동, 공동체..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실망하게 된다. 겨우 이런 것들로 살아갈 의지를 준다고? 하지만 실상 알고보면 이런 기본적인 조건들이 없어 삶을 끝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설은 결국 되돌아온다. 모두가 죽는다. 모두 각자만의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착지하듯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머문다. 다만 누가 먼저 착지하느냐의 순서만 다를 뿐. 다만 중요한 건 내려오는 동안 바라보는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이 세상은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힘든 곳이기도 할 뿐이다.

과연 안락한 죽음은 가능한가? 어쩌면 안락한 죽음은 안락한 삶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구차한 삶은 죽음도 구차하니까.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걸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소설을 읽노라면 떠오르는 드라마 명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보면 어떻게 살지 답이 나오거든요! ."
잘 살게 하는 법. 그것이 바로 안락한 죽음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