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반기에 꼭 기대하는 문학상 작품집이 있다. 바로 '김승옥문학상'이다.
10년 이상의 중견작가, 작가명을 가린 작품만으로 심사하는 블라인드 심사로 유명한 이 문학상은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매년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올해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대상의 영예는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을 비롯해 황정은 작가, 강화길 작가, 김인숙 작가, 배수아 작가, 최진영 작가 등 이미 알만한 굵직한 작품들을 써낸 작가들이 수상의 명예를 올랐다.
먼저 대상을 차지한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을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된다. 화운령에서 있었던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프로젝트. 소설 속 면담자인 박정윤은 김춘영씨와의 몇 차례 인터뷰 후 마지막 인터뷰만을 남겨두고 있다마지막 인터뷰때 김춘영씨와의 깊은 인터뷰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연구팀에 전화를 거는데 동료 연구가는 그에게 말한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고
라이프 히스토리야.
김춘영씨의 생애에서 화운령의 역사적인 장면을 포착하라는 말. 개인적인 김춘영씨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닌 역사의 굴곡이 보이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찾아야 한다는 연구팀의 압박. 하지만 김춘영은 역사의 현장이 아닌 이 마을에서 술을 팔며 살았던 평범한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다. 라이프 히스토리와 라이프 스토리는 상극인 것일까?
우리는 라이프 스토리들이 모여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된다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크고 굵직한 생애만이 인정을 받고 영웅대접을 받는 시대에 개개인의 사소하지만 평범한 나날들은 왜 작게 취급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 자신도 힘들게 현장을 살아왔지만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에 기가 죽고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최윤미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투사 없이, 역사 현장이라는 접점이 없어도 온전히 한 개인의 생에 언어를 입히는 것.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 답은 개인이 라이프 히스토리만을 갈구하지 않고 라이프 스토리를 중시하게 될 때, 평범한 삶이 소중함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을까라고 답하고 싶다. 그 답은 연구팀이 아닌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라이프 히스토리가 아닌 라이프 스토리들이 존중받는 시대. 그 답의 실마리를 나는 최진영 작가의 <돌아오는 밤>에서 찾는다. 챗지피티, 검색, 핸드폰으로 연결되는 매체 기술에 대한 설명은 내가 평론가가 아니므로 제쳐둔다. 내가 최진영 작가의 글에 주목하는 부분은 친구 이향기가 죽고 그의 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 지하철은 끊기고 핸드폰은 방전되고 다리는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영국에서 오는 길이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그가 만난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닌 강도 3인조였다. 돈도 빼앗기고 신분증도 빼앗는 그들은 말한다. 네 신분을 알고 있으니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 순간 끝장이라고. 폭력과 협박 속에 간신히 도망쳐온 그녀는 빈 상가 건물에서 112에 신고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항상 든든한 의지였던 친구 이향기가 남긴 편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시작해.
비록 폭력과 협박을 받은 후 다시 시작하라는 향기의 유언과 같은 편지가 더욱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기죽지 말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용기. 우리가 끝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건 권리라며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는 친구 향기의 말은 어떤 삶 속에서도 우리가 행복해야 할 이유를 제시해준다.
그 밖에도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무관심으로 멍청해서 생겨나는 평범한 악의 모습들을 그린 황정은 작가의 <문제없는, 하루>는 정말 우리의 하루가 문제없는 하루가 맞는지를 정면으로 물어봐주어 역시 황정은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외국어와 해석이라는 사실로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 김혜진 작가의 <빈티지 엽서> 또한 좋았다. 배수아 작가의 글에서는 심사위원의 말대로 나는 종종 길을 잃었고 다시 길을 찾기 위해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가을이 깊어간다. 올해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가을을 통과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설집이었다.
이 가을을, 그리고 내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소중하게 만들어주도록 작은 길을 터 준 느낌이라고 할까.
소설을 읽으며 나의 라이프 스토리를 더 사랑하고자 용기를 내게 만들어준 이 소설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