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표지의 그림부터가 심상찮다.
절실하게 기도하는 듯한 수녀, 그리고 수녀를 가운데에 두고 왼편의 천사의 손에는 총을, 오른편 천사의 손에는 수술용 메스가 들려있다. 임성순 작가의 회사 3부작 『구원』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장편소설 『구원』 의 첫부분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기만되고 왜곡되어 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한 문장. 두 가지의 상반된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선한과 기만.
선한과 기만은 어울리지 않는다. 선한 사람들이 기만되어 있다니.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소설 첫부분. 선한과 기만의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부조화처럼 상반되는 광경이 펼쳐진다.
은혜가 넘쳐야 하는 성당 미사에서 죄임을 고백하는 박현석 베드로 신부.
그리고 죽은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는 의사 범준의 모습.
한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다른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신성한 직업을 가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현석 베드로 신부는 15년 전 지옥과도 같은 곳에 돌아온 후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음에도 여차저차 신부 생활을 이어왔으나 의도치 않은 루머에 휩쓸린 그는 자신을 해임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다. 짐을 꾸려 나가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린다. 자신의 교구에 자살을 시도했었던 여자 신도가 입원실에서 사라진 후 찾았다는 것. 그 현장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왜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고 자신에게 연락하는 걸 의아해 하지만 박 신부는 소녀 신도를 찾았다는 곳으로 따라 간다.
그가 도착한 곳은 폐원한 지방의 종합병원. 그는 그 곳에서 급습을 당하고 밀폐된 장소에 갇히게 된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 앞에는 장기를 적출하는 의사 범준이 있다. 그리고 둘은 15년 전 지옥과도 같았던 그 곳에서의 인연이 그려진다.
의사 최범준과 신부 박현석 신부.
두 사람이 먼 빈민국에 있는 곳에 오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한 명은 의료혜택이 없는 국가에 순수하게 의료를 펼치기 위함이다. 국제의료단체에 자원하여 이 오지에서 그는 병원을 세우고 부족을 교육시켜 의료진으로 키우기 위해 교육한다.
박 신부 또한 지원자가 없는 이 오지의 교구에 자원하여 성도들을 돌보며 미사를 강론한다. 그들이 베푸는 선의가 이 현장을 아름답게 가꾸어줄거라 두 사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이 나라는 소수 민족과 다수 민족간의 갈등이 항상 존재했지만 이들이 모두에게 베푸는 봉사와 선의는 두 민족의 갈등을 뛰어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전후, 그리고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앞에 상황은 급변한다.
한때 동지였던 소수 민족과 다수 민족은 서로를 '쓰레기' 또는 '벌레'라고 부르기를 서슴치 않으며 살생을 서슴치 않는다. 한 때 자신들을 믿고 따랐음에도 현실 앞에서 외국인인 박 신부마저 죽이기를 겁내지 않는 그들의 앞에 신부는 좌절한다.
소설 『구원』 은 극단의 상황을 보여주며 읽는 이들을 끊임없이 몰아세운다.
인간은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는가? 인간은 끝까지 선을 지킬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소설 속 아수라장 현실 속에서 인간의 선의가 종이 한 장처럼 얼마나 가벼운지 보여준다.

어제의 형제가 오늘의 쓰레기가 되고 벌레가 되는 이 현실 앞에 소설은 진지하게 묻는다.
완전한 구원은 가능한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인간의 선의와 상황에 따라 총구를 겨누는 인간의 잔혹한 본성은 신마저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신마저도 막을 수 없다면 인간의 희망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단지 내전 때문이 아니라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는 조직, 성당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나 조직에서도 언제든 사람은 총과 칼을 들 수 있다. 범준이 수술용 메스를 들어 환자를 살렸지만 죽음의 수술대에서는 사람을 죽여 장기를 적출하듯 언제나 선과 악을 행하는 사람의 본성. 각자의 상황에 자신들의 '선의'를 위해 타인에게 '악'을 행하는 인간의 모습은 결국 선과 악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소설 『구원』 은 끝까지 읽는 이를 몰아간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지난 12월에 있었던 비상계엄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소년이 온다>를 이야기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계엄을 다시는 불러 일으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상계엄을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가 얼마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 비상계엄 또한 우리에게는 악의 행위처럼 보였지만 행하는 사람은 선의의 발로였다. 선과 악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설 속에서 끝내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답을 할 수 없음에 우리는 탄식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에서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구원.
참으로 묵직한 소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