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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님의 서재
  • 배를 엮다
  • 미우라 시온
  • 12,150원 (10%670)
  • 2013-04-10
  • : 2,683

이 책,'배를 엮다'를 처음 손에 받아 들었을 때, 매일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받아 습관적으로 처리해 버리고 마는 숙제 같은 느낌으로페이지의 첫 장을 열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느낌이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다른 색조를 입어가더니 궁극에 가서는 완성된 한 권의 대사전처럼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독서 후 소감에 대해 차분히 얘기를 하고 있는 걸 감지했다.


대개의 소설이 사건을 중심으로 발생 가능한 심리들을 주위에 깔며 물 흐르듯이 전개해 나가는 것과는 달리, '배를 엮다'라는 소설은 단순히 사전 편집에서 완성이라는 결말을 독자들이 미리 아는 상태로 시작을 하는 데다, 도중에 특별한 이슈없이 한 권의 사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오로지 편집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과 부원들의 일상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여느 도서들에 비해 완독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단순함 속에는 정밀함이 내재되어 있기때문에 그 해석과 함께 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라는 말에서처럼 우선 이 책의 표제, '배를 낚다'에서 '배'란 사전을 의미한다. 이 책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대도해]라는 대사전의 완성을 향해 시대적 흐름의 중앙에 서 있는 마지메가 될 것이지만, 그 이전에 감수 마쓰모토 선생도 그 이전에는 중심이자 주인공이었고, 그 바로 아래 후계자이자 마쓰모토의 동반자인 외부편집자 아라키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세명에다 계약직으로 회사 편집부에 들어와서 자료실의 업무를 묵묵히, 성실히 해나가는 사사키 또한 사전편집부가 [대도해]라는 섬에 안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조 조타수 역할을 훌륭히 해냈으며, 책을 읽는 내내 사사키라는 존재감이 '외로운 마지메'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끔 해주었다. 그리고, 사전 편집에 일생을 거는 마쓰모토, 아라키, 마지메, 사사키 속에 빛이 가려졌지만, "사전은 팀워크의 결정체"라는 아라키 선생의 말에 부응하듯 머지않아 선전광고부로 자리를 옮기게 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대도해]라는 사전 편집을 위해 마지막까지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니시오카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 니시오카의 후임으로써 대도해 사전을 기획한지 13년 후에 여성 대상 패션 편집부에서 온 가시베까지 이들은 모두 사전이라는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데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조각들이다. 그리고 레미, 가구야, 다케할머니 등등 밤 바다 위로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지금 아슴히 멀어져 간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전 한 권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기도 몰랐지만 그 전에 아예 관심조차 하지 않았었다. 표제어 20만 단어 이상을 [대도해]라는 한 권 사전에 싣기 위해 15년이란 세월에 걸 편집부 원고, 의뢰 원고, 그리고 수없는 퇴고를 거쳐 반복되는 용례확인의 마침까지 사전편집부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 그 일상을 보면서 특별한 자긍심 없이 직장 생활을 해 온 내 자신의 세월을 반추해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전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한치의 오차마저 제거하기 위해 후세에 길이 회자 될 이른바, 긴부쇼부 지옥의 진보초 합숙을 한달 가량 한 편집부원과 수십 명의 대학생 아르바이트원들을 포함하여 영업부, 선전광고부, 디자인부, 그리고 얇고 가볍고 뒷면이 비치치 않는 궁극의 사전용지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제지회사까지 저마다 하나의 배를 탄 중추적인 사공이 되었다.


사전은 5번의 교정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 속에 편집부원들의 소리없는 피땀이 흐르는데, 대개 4차의 수정부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단어의 삽입이나 빼기를 안 한다. 그런 4차 교정 과정 중에 중요한 표제어 하나가 빠진 걸 발견하고는 긴급하게 편집부 전원과 수많은 대학생 아르바이트원들을 향해 "여러분 긴급 사태입니다. ...오늘부터 합숙입니다" 라고 말하는 마지메의 마음과 그에 곧바로 수긍을 하고 오히려 책임의식으로 전열을 가다듬는 전원의 반응에 마음 쨘한 감동을 받았다. 위기에 하나로 똘똘 뭉친 숙명의 정예 아군들의 모습이다.


저자 미우라 시온은 이 책의 완성을 위해 실제로 편집부에 살다시피 드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우라 시온은 그 노력의 댓가로 어느새 겐부쇼보 사전편집부 대원이 되어 마지메와 아라키, 사사키 등과 함께 15년에 걸친 노력에 동반 하게 되고, 그 결과 [대도해]라는 사전을 완성시켜 나오키상이라는 명분보다 실리라는 서점대상 1위를 차지하게 된 것 같다. '배를 엮다'는 그녀의 일생 속에서 빛이 될만한 뛰어난 업적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가져본다. 미우라 시온의 뛰어난 필력은 표현력에 있다고 본다. 대상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비유를 갖다 붙이는 능력이 한마디로 타고난 글쟁이다. 게다가 간혹 심연 속 깊이 스민 시적인 표현도 배가 다니는 물결을 일렁이게 한다. 가령, - 수면에 떨어진 예쁜 꽃을 떠올리는 손길로 - 라든지, - 죽은이와 이어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과 이어지기 위해 말을 만들었다 - 라는 표현 외에 책갈피 속에 새겨진 정금 같은 표현들이 즐비하다. 성숙된 중년작가로써의 미우라 시온 차기작을 지금쿠터 차분히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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