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위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자기 내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 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 위치에 또 하나 다른 밝음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킨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잡기에는 나 자신이 순질(純質)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까보다.
이 밤이 나에게 있어 어릴 적처럼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好敵)이면 그만이다.
비 오는 밤
솨! 철석! 파도 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 떼처럼 살래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리 여미는
삼경(三更), 염원
동경의 땅 강남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停車場)에서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기차(汽車)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下宿房)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汽車)는 몇 번이나 무의미(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停車場)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산협(山)의 오후
내 노래는 오히려
젊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限想)은
아 졸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序曲)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恐怖)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者)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者)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勝利者) 위인(偉人)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쉽게 쓰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식권(食券)
식권은 하루 세끼를 준다
식모는 젊은 아이들에게
한때 흰 그릇 셋을 준다
대동강(大同江) 물로 끓인 국
평안도(平安道) 쌀로 지은 밥
조선(朝鮮)의 매운 고추장
식권은 우리 배를 부르게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루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팔복(八福)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오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에
눈이 아니 온다기에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