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는 김덕영의 ‘사회의 사회학’을 통해 알게 된 사회학자다. 김덕영은 사회학의 오디세이를 표방하며 12명의 사회학 거장을 소개한다. 사회학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오로지 맨몸으로 이 책을 읽었다. 12명의 학자들 중 몇몇은 처음 들어본 학자기도 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언급된 학자들의 단행본을 읽어본 경험도 전무했다. 그들의 농도 짙은 언어를 짧은 글로써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론을 소화하기보단 차근차근 김덕영이 이끄는 여정을 따라가는 정도로만 독서를 했다. 사회학자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어떠한 학문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발판 삼아 거장들의 생각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2명의 거장 중 엘리아스를 가장 처음 만났다. <문명화 과정 1>은 엘리아스의 대표 저작으로서 그의 주요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머리말과 더불어 1,2부로 나눠져 있다. 머리말은 그의 사회학 이론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왜 쓴 지부터, 어떠한 개념틀을 활용해 사회학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사회학을 혼자 공부하는 나에게 머리말은 소화하기 힘들었다. 읽는 내내 독서의 흐름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농도 짙은 언어들은 길을 한참 헤매게 했다. 머리말이 이 책의 가장 큰 고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머리말에서 이 책을 포기했을 거라 생각한다.
힘든 머리말을 읽고 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기다린다. 1부는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 대립이 생겨난 이유와 프랑스에서의 문명 개념을 다룬다. 같은 시기에 이웃한 두 나라는 문화와 문명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엘리스아스는 이러한 차이의 이유를 각 사회에서의 중산층의 역할 및 지위에서 찾고 있다. 2부는 서양의 옛날 관습들을 살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들로 이뤄져 있다. 식사 중 예절, 생리적 욕구, 코 푸는 행위, 침 뱉는 행위 등에 대해 각 시대마다 서로 다른 규율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이 이전의 시대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아스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관습이 변하며, 그 변화의 방향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현재 내 지식으로 소화가 불가능한 책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문장 수집을 위해 붙여둔 포스트잇만 약 70쪽이 된다. 이것들이 어려운 책이지만 내가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어려운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만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모두 담고 싶었다. 이 생각들이 한 번에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스스로 만족하지 않은 독서를 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글을 쓸지 고민을 했다. 책을 평가하거나 감상하는 입장보다, 다음번에 이 책을 다시 읽을 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벌 독서는 이 책의 잔상을 남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김덕영의 사회학의 사회학을 다시 꺼냈다. 그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를 서술하는 부분을 천천히 읽었다. 밑줄을 그으며 열심히 읽은 책이었는데도, 모든 부분이 새로웠다. 그래도 ‘문명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엘리아스의 잔상을 곁들여 읽으니 더욱 많은 것을 건질 수 있었다.
엘리아스 사회학의 중심적인 경험적 - 역사적 관심은 문명화에 있다. 그는 결합태 사회학/ 과정 사회학의 근본 문제를 결합태, 과정 및 문명화로 포착한다. 엘리아스가 보기에 사회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발전에 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의 발견이나 정립이 아니다. 그는 사회학이 ‘사회적 사실들의 관찰 가능한 상호 관련성과 법칙성에 대한 모델/ 이론’의 구축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엘리아스에게 사회란 다수 개인들의 상호 결합과 의존과 같다. 그는 이를 결합태로 부른다. 사회가 변동한다는 것은 결합태가 장기간의 과정을 거쳐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학은 바로 이 결합태의 변통 과정으로 이론적이고 경험적으로 논구해야 한다.
엘리아스가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엔 외부 세계와 이념의 영역(초월적 아프리오의 영역)인 인간 내부 세계가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내적으로 자조적인 폐쇄적 인간상이 지배적이었다. 엘리아스는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 해부학 공부를 통해 인간의 두뇌가 지속적으로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를 매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넘어 타인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개방적인 인간상 관념으로 이어졌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며 철학의 한계를 절감해 사회학으로 개종을 하게 된다. 엘리아스는 사회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들이 철학자로서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문제들은 무엇보다 구조화된 역사이며, 비-구조적인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과는 상반된다.
그에게 개인과 사회는 모두 과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인간과 관련된 이론을 구성할 경우 과정의 성격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개인을 하나의 과정을 지나가는 존재라고 이해한다. 그 관점에 따라 인간은 항상 움직임 속에 존재하는 과정을 통과하는 존재일뿐더러, 그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발전한다. 그리고 발전이라 함은 연속적인 과정에 내재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후기의 모습은 전기의 모습으로부터, 청소년은 유아로부터, 성년은 청소년으로부터 형성된다.
엘리스아스는 사회를 개인들의 상호적 의존과 작용의 관계로 해체한다. 사회는 단순히 인간들이 점증적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공동생활은 혼돈, 우연, 무질서 속에서도 아주 특정한 형태를 갖는다. 인간들은 근본적인 사회 의존성에 의해 언제나 특별한 결합태 속에서 집단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사회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결합태로 이뤄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회는 개인들이 상호 결합하고 의존하는 사회적 그물망인 결합태의 합인 것이다.
결합태의 개념으로 개인과 사회를 파악하면, 이 두 실체를 단순한 기계적 병렬관계나 이분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이해할 수 있다. 즉, 개인과 사회가 상이하며 더 나아가 적대적인 두 형상인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적 강제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우주에서 서로 분리돼 존재하는 두 객체가 아니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측면인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사회학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에게 개인과 사회는 동일한 인간의 상이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두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이 개인적 존재면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인칭대명사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의 인칭 대명사는 다른 인칭 대명사를 전제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의 인칭 대명사는 다른 인칭대명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기능을 하고 의미를 갖는다. 너, 그, 그녀, 우리, 너희 없이는 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너 또는 우리와 같은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과 결부돼 있다. 이는 인칭대명사가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즉, 근본적으로 사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엘리아스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엘리아스는 궁정 사회를 단순히 하나의 고립된 생활세계로 간주하지 않는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궁전 사회가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시대의 궁정 사회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된 다수 인간들의 사회적 결합태의 특정한 표현이며, 따라서 어떤 한 개인이나 또는 어떤 하나의 인간 집단에 의해서 계획되거나 의도된 결과로 발전한은 아니다.
궁정 사회는 사회 발생적 측면에서 볼 때 중앙집권적 절대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발달한 결합태이다. 국가는 중세적 봉건영주들을 국왕의 단순한 궁정 귀족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이 전의 중세 시대의 가치와 미덕은 궁정 사회적 결합태에서 반문명적인 형태라고 비난받기까지 했다. 또한 사회 발생적 문명화 과정은 심리 발생적 측면에서 궁정 귀족의 세속적 지배계급의 인격 구조와 행위 구조의 변화를 수반했다. 중세의 전투적 사회구조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몸과 육체적인 것의 비교적 직접적인 표출 그리고 감정과 충동의 통제되지 않은 발산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게 됐다.
궁정 사회에서 보듯이 인간은 사회 발생적/ 심리 발생적 측면에서 문명화 과정을 거친다. 현재 역시 문명화 과정에 있다. 문명은 지속적인 균형 상태를 의미하는데, 현대 역시 국가 간/ 국가 내 긴장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폭력, 아주 야만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엘리아스의 문명화 개념 틀은 이러한 폭력과 야만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