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에는 수억만 개의 구멍이 있다. 갯지렁이는 구멍 위로 머리를 내놓고 산다. 이 구멍들이 뻘에 공기를 불어넣어 갯벌은 숨쉰다. 그것들 이 살아가는 꼴에는 이 세상 먹이사슬 맨 밑바닥의 비애와 평화가 있다. 그리고 구태여 고달픈 진화의 대열에 끼어들지 않은 시원始原의 순결이 있다.
공깃돌만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나 방어 의지도 없이, 다만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다의 새들이 부리로 갯벌을 쑤셔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을 때, 그것들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라 보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