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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님의 서재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었다. 하루끼의 글을 읽은 후엔 대개 그 줄거리 조차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비평가들이 말한 것처럼 그의 글쓰기가 원숙한 경지에 다다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내가 하루끼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담백함이다. 어떤 심각한 일도 그가 쓰면 그저 담담한 일이 된다. 심지어 성적 묘사조차도... 그래서 때로는 가벼운 느낌마저 든다. 물론 그 가벼움이 경박함은 아니다. 그의 글은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투명해서 연필 선까지 보이는 수채화, 그중에서도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그는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을 때, 하루끼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은 아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그의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난 그의 글을 그래서 더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삶의 치열함은 볼 수 없다. 그저 삶을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방관자적인 삶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한 글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라고 책소개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연작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별로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글마다 '고베 지진'과 주인공이 연관되어졌다는 사실이 연관성이라면 연관성일까? 특이한 점은 고베지진에 관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글 '쿠시로에 내린 UFO' 는 고베 지진의 뉴스만 밤낮으로 열심히 보던 아내가 홀연히 집을 나가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남자의 이야기다.

두 번째 글 '다리미가 있는 풍경'은 고베에 가족이 있는 화가의 이야기일 뿐이고, '태국에서 일어난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아픔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그 남자의 고향이 고베였다.

주인공들 모두 고베 지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고베 지진으로 인해 아내가 집을 나가거나, 예전의 아픔을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고베 지진을 통하여 전하려고 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현장에서 지진을 겪진 않았지만, 주인공들의 삶은 그 지진의 영향을 받는다. 세상속에서 우리의 삶은 결코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예전의 하루끼의 글과 다른 점은 주인공들이 삶의 아픔이나 상실감에 대하여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벌꿀 파이'에서 주인공인 작가 쥰페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설을 쓰자고 쥰페이는 생각한다. 날이 새어 주위가 밝아지고, 그 빛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꼬옥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을.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두 여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설사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대지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고 해도.

어쩌면 쥰페이의 글이 하루끼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는 하루끼의 삶의 철학이 담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의 글을 보여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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