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감상을 모아놓은 말랑말랑한 제목의 미술책이 대세인 현실에서 이 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그림 정독. 그림을 자세히 읽는다? 게다가 무려 496쪽의 볼륨. 그런데 달랑 6점의 그림을 읽고 있다. 놀랍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분량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에게 생소한 저자의 첫 책임에도 불구하고 긴 원고를 관통하는 사유의 힘이 대단하다.
‘한 점의 그림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니!’ 책을 읽다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저자는 여섯 점의 그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며 그림에 깃든 인간과 세상의 비밀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한 점의 그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화가의 존재와 그런 그림을 낳은 시대상황 등으로 메아리처럼 번진다. 게다가 같은 주제가 담긴 다른 화가의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의 세부를 극사실화를 그리듯이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런 가운데 그림에 내재된 세계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약력을 살펴봐도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박제’라는 이름도 ‘박제가 된 천재’를 의식한 필명인지 모른다. 다만 “독일 땅을 떠나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예술이라는 길에 들어서다 보니 해야 할 공부가 갈수록 많아져 지금까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미술사나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관된 호흡으로 이렇게 치밀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얼굴 없는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