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도 어렸을 때 저만큼 부모를 사랑했을까? 처음 먹어 보는 작고예쁜 초콜릿을 엄마 아빠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방법을 고민했을까? 손에 쥐고 가면 녹을까 걱정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연두처럼 나도, 얼마의 감기약이 식을까봐 약국에서 집까지 약 봉투를 품에 안고 달려간 적이 있다.
다만 어린 나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사랑도 감사의 표현인 양 생각했던 것 같다. 고마워서 사랑한 게 아닌데, 엄마 아빠가 좋아서 사랑했는데, 은혜에 대한보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다.
어린 나도 몰랐고,아마 부모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는다. 다만 서툴러서 어린이의 사랑은 부모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하는지 모른다. 마치손에 쥔 채 녹아 버린 초콜릿처럼.
- P179
키가 작다고 해도 사물이 그런 식으로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나와 어린이는 키만 다른 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 안노 미쓰마사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그것을 원근감의 차이로 설명한다.
멀리 떨어진 사물의 크기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어린이 쪽이 더 좁다는 뜻이다. 어린이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살던곳에 가 보면 동네가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 P200
어린이와 어른의 척도가 이렇게 다른데 세상이 돌아가는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는 몸집이 커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안 해 봤을까? 어른이 되고서 크니까 좋구나, 속이 다 후련하다!" 했을 법도한데, 일단은 내가 천천히 자랐기 때문이다. 날마다 조금씩,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자라면서 어른들 중심의 세상에 적응해 왔을 것이다. 덕분에 멀미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어린 시절에 얼마나 불편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동안 나는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격차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영역이 얼마나많을까?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둔감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P201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세련된 노인‘ 이나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 손님으로 받는다고 하면 당장 문제라고 할 것을, 왜 어린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걸까? 중요한 차이가 있긴 있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
- P211
이른바 ‘노 키즈 존‘을 두고 말이 많으니, 에둘러 아이를제대로‘ 돌보지 않은 부모들에게 탓을 돌리겠다는 심산이다. 점잖은 듯 우리는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어른이 문제다하는 식으로.
자녀가 없는 나조차 불쾌감이 드는 언사인데 어째서 기사는 희망적인 어조로 쓰인 걸까.
"다수의 식당이나 카페가 아동 출입을 금지하는 바람에 갈 곳 잃은 부모들은 ‘노 배드 패런츠 존‘ 도입을 적극 환영하는 분위기"라니,
어리둥절했다. 이런 명명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는 부모들이 있다는 기사의 주장도 믿기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 슬프다. ‘나쁜 부모‘면 들어오지 말라는 가게 안내문을 보고, 자기 검열을 거쳐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는 나쁜 부모가 아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아이들을 단속해야한다는 것인가.‘노 키즈 존‘이든 ‘노 배드 페어런츠 존‘이든,
차별의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다. 쏘아보는 쪽이 어린이인가부모(실제로는 엄마)인가가 다를 뿐이다.- P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