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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님의 서재
  •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 김헌
  • 18,000원 (10%1,000)
  • 2022-03-30
  • : 4,251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소박함이 있고, 지혜로움을 사랑하되 유약함이 없습니다. 부를 일의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말로 자랑할 대상으로 사용하지 않지요. 가난을 수치라 여기지 않고 벗어나려 일하지 않음을 수치로 여깁니다. _《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연설문 중 일부. 《김헌의 그리스로마 신화》 서문에 실린 문장이다. 아테네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가장 위대했던 것은 그들이 아름다움과 지혜로움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지혜를 사랑하는 일과 신화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적는다. 세상의 탄생과 현상들을 궁금해하며 던진 질문들에 신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답한 것이 신화이고, 신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따라서 지혜(sophia)를 사랑(philo)하는 자, 철학(philosophia)자라는 것. 단순히 유용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이라는 논리다. 철학과 신화에 매료되는 이유가 그래서였다니.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이 가는 독자로서 어쩐지 모든 것이 논리정연하게 맞아떨어진다. 무에 우주의 진리를 발견하겠다고.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수요일에는 《김헌의 그리스 로마신화》 강연이 있었다. 평소 좋은 북토크가 많아 눈여겨보던 서교동 마음산책 출판사 내 강연장 마음폴짝홀 첫 방문이라 더 설렜다. 주제는 테베 신화와 오이디푸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을 운명이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타고난 코린토스 왕자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자 왕자를 포기하고 길을 떠난다. 여정에서 무례한 왕족과 스핑크스를 처치해 테베의 왕이 되지만, 테베에 때아닌 역병이 돌고 그 이유가 전왕 라이오스의 살해자 때문이며, 범인이 자신이고 아내로 맞은 미망인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두 눈을 도려내 스스로를 테베에서 추방한다는 이야기. 언제 들어도 섬뜩한 운명론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인간은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는 정도의 믿음이지만, 삶에는 얼마간 정해진 부분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왜 인간은 열심히 사는 것과 무관하게 고통받는가. 오래 전 그 의문은 사주팔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년, 월, 일, 시를 뜻하는 네 개의 기둥 4주, 한 기둥 내 천간과 지지 두 글자씩, 8자로 이루어져 사주팔자다. 여기서 자신을 의미하는 세 번째 기둥인 일주의 천간, 즉 일간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글자는 ’십신‘이라는 열 개 글자 중 선택되는데 그중 일곱 개만, 때로 같은 글자가 겹치기도 하니 팔자에 모든 복을 고루 갖춘 완벽한 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 사주와 10년 단위로 바뀌는 대운의 흐름을 맞춰보는 것이 사주 풀이다. 유명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고 관련 책들을 주워 읽은 잡지식이지만.

결론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결핍된 존재이며, 아무리 잘 타고나도 운의 흐름과 맞아야 한다는 것. 지혜롭고 용감하며 도덕적으로 고결했던 오이디푸스마저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의 무자비 앞에서는 속수무책 아니었던가. 반대로 말하면, 특출나지 않아도 타고난 기질에 맞는 길을 잘 선택하면 비교적 평탄하게 산다는 뜻이다. 저마다 정해진 길이 다르니 남을 부러워할 것도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사업하면 안 될 사주라는데 굳이 하겠다고 나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그렇기에 옛 선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셨으며 오늘날 지성인들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부르짖는 것 아닐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지만, 오이디푸스가 영웅으로 존중받는 것은 그가 스스로를 응징하면서까지 테베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냈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무력하게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말에 행동으로 책임을 다한 것. 그래도 두 눈까지 도려내지는 말지, 오이디푸스는 그러나 그 선택으로 마음만큼은 한결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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