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소포 꾸러미 하나가 식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면서 뜯어 보니, 서평쓰기 대상 도서 '노다메군의 일드견문록'이 도착한 거였습니다.
약간 밝은 황토색 종이에 싸여 있었고, 책정보에서 보시다시피 표지도 여행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여행 중에 누군가가 보내온 엽서나 편지 같아 보였습니다.
목차를 넘겨 보니, 아!이거 내가 본거구나! 하고 무릎을 친 작품은 거의 애니메이션에 국한되더군요. 이다음에는 여기 있는 작품들을 다 접해 보고 나서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도쿄의 구석구석에 있는 각종 미디어작품 촬영지를 꼼꼼이 돌아보고 나서, 요코하마, 치바, 기마쿠라, 에노시마, 시즈오카현, 간사이, 홋카이도, 야마가타현, 도치기현으로 이어지는 서술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활자를 읽고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은 거의 문어체로 쓰여 있음에도 마치 잘 아는 사람과 직접 만나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저는 이 책을 꽤나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테마의 기반이 된 작품들을 거의 접하지 않은 때문일까요, '첫장부터 드라마 영화 네타냐!'라고 약간 언짢게 생각한 것도 잠시, 작가의 맛깔난 글솜씨에 매료되어 대상 작품에 대한 독설조차도 웃으며 읽어내려갔습니다.(사실, 미디어 작품을 평하는 것이 언제나 호평이 될 수는 없겠지요. 각자 주안점을 두고 보는 부분이 다르니까요. 이쪽이 좋지만 저쪽이 별로일 수 있으니 이런 책에서도 호평과 혹평이 공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림 솜씨만 있다면 글만 보고도 서술자가 지나온 풍광이며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 있고 쾌활한 묘사에, 근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여러 기념품이나 음식 소개, 친절한 맛집 정보를 곁들인 사이사이로 슬쩍 비치는 장난스러운 몇 마디와 준엄한 몇 마디. 별달리 특별한 단어를 쓰지 않는데도 재치있는 문장이 지면을 채워 나가기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기행문에 불과한데도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미디어 작품을 즐기는 이가 쓴 글이라서였을까요? 작품에는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비롯해서, 영상 작품(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나왔던 어구나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진지함 속에 소소한 유머를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섞어 예상치 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문장이 많습니다. 그걸 찾아보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한 재미가 될 수 있겠지요.
작가가 여행한 곳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미디어 작품의 여운을 테마 여행으로 즐긴다는 뿌듯한 느낌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여행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민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본은 '왜(倭)라고 불리던 그 시절부터 우리나라와는 좋든 나쁘든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니까요. 아니나다를까, 오사카 성에 이르러 그 주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야기 일색인 것을 보고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와 일본의 어느 대중적인 탤런트가 극우익 성향을 지녔더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 도쿄박물관의 우리나라 유물들을 보고 안타까웠다는 이야기 등, '일본'이라는 지역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주는 약간 특수한 감정이 이 책에서도 역시 배어나왔습니다.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당시의 그 혼란했던 논란들이 상상이 되었기에, 이런 대목에서는 마음이 그리 좋지를 못했네요. 하지만 작가는 역사에 대한 앙금과 미디어작품 촬영지에 대한 평가를 섣불리 겹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중하고 공정한 태도라 해도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한수 배웠습니다.
약간의 앙금이 남아 있다 해도, 여행하면서 노다메군이 만난 사람들은 거북한 이들보다 푸근하고 친근한 이들이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공짜로 자전거를 빌려주신 데다 아이스크림과 귤까지 덤으로 주신 분, 싸게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신 분 등, 아무래도 일본도 사람 사는 데다 보니 정이 오가는 것은 우리네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일상을 박차고 떠나온 여행길에서 이런 사람들을 잠시 몇 명만 만나 봐도 어느새 마음이 훈훈해져 오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외국에서 이런 분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느끼는 감정이 남다르지 않을까 하고 슬쩍 상상해 봅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형태가 어떻든 문화가 빠질 수 없겠죠? 애초에 이 책에서 다루는 여행의 테마도 일본의 영상 콘텐츠, 즉 문화 산업에 관련된 곳을 찾아보자는 취지였으니 문화 이야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겁니다. 문화를 넓게 보아 '인간의 생활 양식'이라고 한다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음악이나 영화, 연극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여러 물품들과 싱그럽게 피어나는 학생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까지도 문화에 포함될 테지요. 작가가 공들여 소개하고 설명하는, 이런 소소한 문화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미 그 장소에 다녀온 작가가 부러워지더군요. 가능하다면 지금 곧 달려가도 여기에 소개된 것들이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기분좋은 생각에 젖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별 거부감이 없이 우리나라와는 약간 다른 일본의 문화와 풍습을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기행문을 읽는 묘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문화의 다양성 아닐까요?
작가는 테마 기행문을 독자 여러분이 일본에 대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에필로그로 마무리한 뒤에, 지금까지 소개했던 지역들의 상세 지도를 딸림자료로 첨부해 놓고 있습니다. 이 책 한 권만 들고도 책에 나온 촬영지들을 어느 정도는 찾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이겠지요. 독자를 생각하는 세심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다만.
이 책이 2009년 7월 23일 초판 1쇄를 간행해서, 재쇄나 재판 없이 지금까지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전제를 하더라도, 말줄임표를 온점을 나열한 것으로 대신한다거나 마땅히 띄어 써야 할 대목을 붙여 쓴다거나 마땅히 붙여야 할 어미를 떼어 버리거나 낱말에서 한 글자 정도를 빼먹는 등의 실수가 의외로 제법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상당히 거슬리는군요. 부디 다음에 재쇄나 재판을 하시거든 초판의 오탈자나 맞춤법 위반이나 문장 부호 오류 정도는 고쳐서 출판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뿐 아니라 에필로그에까지 이러한 오탈자가 보입니다. 재미있는 여행 후기를 읽고 나름대로 흡족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차마 평점에 별들을 모두 칠하지 못하고 네 개만 연두색으로 채워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