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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상님의 서재
  • 방랑, 파도
  • 이서아
  • 13,500원 (10%750)
  • 2026-03-12
  • : 1,380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문득 이서아 작가의 당선 소감이 생각났다.
“물론 삶은 좆같지! 그러나 오늘만큼은 네가 마음껏 웃길 바란다!”
그런 마음이 담겨 있듯 그녀의 글에는 방황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의 전작 '어린 심장 훈련'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화자가 도망치고 갈등한다.
우리가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야 하는 건 끊임없이 방황한 끝에 마주한 끝에 만나는 저 너머의 선이다.

어머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건 바다야."
그리고 어머니는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쥐었다가 풀면서 말했다.
"자, 이건 파도야."
빗금의 논리 p58

그 손바닥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길게 뻗어있다.
선 너머로 소중한 사람이 건너갔다.
우리는 죽어서 그곳에 가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죽기 전까지는 나도 우리도 모두 밀려오는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으레 바다를 아는 척할 수도 있다.

트리플 시리즈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세 편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여섯 인물이 모두 등장하며 돌아가며 자신의 사연을 얘기하고, 숨겨 왔던 감정과 비밀을 드러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일 없이 멀리 날아가는 새를 관조하듯 가만히 해변에 서 있다.
이 작품의 매력은 관찰하며 지나가는 세계를 넘어갈 때 일어난다.
바다 너머로 보이는 선을 넘으려고 할 때, 물에 몸을 담가 다가서려고 할 때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을 대표하는 단편 '방랑 파도'를 소개한다.
화자인 '나'는 작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요양원에 취직했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다가 발견한 옥반지를 중심으로 '향자'라는 할머니를 알게 되고 책과 반지를 받게 된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향자 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선을 넘어 그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때 난 '선을 넘는다.'라는 말이 유독 새롭게 들려왔다.
어릴 때 벽돌로 지은 집에 추위에 떠는 1개월도 안 된 강아지 두 마리를 집어넣었다.
추울까 봐 따뜻한 밤을 보내길, 곤두서있는 털이 조금이라도 가라앉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음 날 강아지 두 마리는 서로를 껴안으며 털이 얼어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내 마음도 얼어붙어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 있던 형은 '묻어줘야지.'라고 말하며 뒷산으로 올라갔지만, 언 땅에 아무리 삽을 들이대도 철판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 형제는 강아지 두 마리를 껴안고 맨땅에 앉아서 해가 떠오르고 언 땅이 시간이 지나 녹기를 기도했다.
해가 점점 하늘 높이 걸릴수록 거대한 존재가 자고 있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순간 그늘이 지고 우리 앞에 선 거대한 존재는 강아지 두 마리를 지켜보더니 등을 돌려 선 너머로 향했다.
그때 우리는 볼품없이 작았다.
손톱만큼 작았다.
모래만큼 작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는 뛰지 않는 심장을 품에 안고 언 땅이 녹아내리길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거대한 존재가 절을 하듯이 두 손을 바다에 댄 채 엎드려 고개를 돌렸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존재였다.
나는 볼품없이 작았다.
손톱만큼 작았다.
모래만큼 작았다.
방랑 파도 p51

이후로 이어지는 '빗금의 논리'라는 단편에서도 첫단편에 등장했던 백반집 남매가 등장한다.
그들 중 '지예'는 아이를 사고로 잃었으며 '지환'은 누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한다.
"자전거를 가르쳐준 걸 후회하지 마."
후회라는 감정은 파도와 닮았다.
그때 해변에 앉아 가만히 파도가 치는 걸 지켜보면 편했을 일을 소중한 무언가를 파도에 던졌다.
떠나간 파도 사이에서 다시 밀려온다.
소중한 무언가가 떠오르지만, 다시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떠내려간다.
나는 잠시 후회한다.
"벽돌로 집을 짓지 않았다면."
그런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다가 떠나간다.
살면서 어떤 사건을 겪은 뒤 우리는 그 사건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다.
'사건'이란 사고로만 치환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화자를 비롯한 여섯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크고 작은 죄책감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러한 지점을 포착한다.
어떤 이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죄책감이 있다.
그럼에도 꼭 돌아오길 바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어머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건 바다야."
그리고 어머니는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쥐었다가 풀면서 말했다.
"자, 이건 파도야."-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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