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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상님의 서재
  • 나이트 트레인
  • 문지혁
  • 13,500원 (10%750)
  • 2026-02-05
  • : 3,210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여행하는 책📚

우리는 여행 갈 준비를 한다.
그러다 지난 여행에서 찍어둔 필름 롤이 눈에 들어온다.
무려 삼백 장 가까이 되는 분량을 아직 인화하지 않았다.
나는 주로 올림피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 속에 내 모습은 단 한 장도 없다.
아마 그럴 것이다.
에펠탑 앞에서 멋있게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을 찍어주고, 마르크트 광장 중앙의 동상을 담았다.

한때는 프라하행 야간열차에서 만난 그녀와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떠한 기록 장치도, 기억력도 변변치 않았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잊어버렸다.
그 사실을 떠올린 건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 사죄하듯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여행 내내 노트를 들고 다니며 순간을 소설로, 시로 남겼다.
장면을 물리적으로 붙잡고 싶어 아버지가 쓰던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성가신 존재였다.
찍는 즉시 결과를 보여주지도 않고, 부지런히 사진관을 찾아가 인화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카메라를 놓지 못했다.
손에 땀이 나도록 붙잡고 다녔다.
필름 카메라는 단순한 구조로 작동한다.
렌즈를 통해 빛이 들어오고, 조리개가 빛의 양을 조절하고, 셔터가 일정 시간 동안만 빛을 통과시킨다.
빛에 반응한 화학 물질은 그 순간을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필름 위에 새긴다.

노출의 정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단노출은 찰나를 선택한다.
짧은 시간 동안만 셔터를 열어 한 점의 시간을 고정한다.
장노출은 시간을 축적한다.
셔터가 열려 있는 동안 일어난 모든 움직임을 겹겹이 쌓아 수용한다.

나는 장노출처럼 그녀를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그녀와 다시 만난다면.
그 생각이 무섭도록 천천히 다가올 때면 나는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고 셔터를 눌렀다.
약속 장소였던 빈에 도착했을 때, 나는 플랫폼에 앉아 한참을 시간을 흘려보냈다.
손에 쥔 카메라로 빈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찍었다.
열차는 빨랐고, 셔터는 오랫동안 열렸다.
열차는 또렷했고, 배경은 빛으로 번졌다.
건물의 네온은 선이 되어 흐르고, 열차는 그 사이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빛이 번지는 건물들 사이로 나는 끝없이 전진하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필름으로 찍는다는 건 곧 암전을 감수하는 일이다.
암전 이후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현상되기 전까지는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했다.
혼란스럽고 흐릿했던 시간이 지나 이미지는 현상액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나는 그 사진 어딘가에 그녀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남은 것은 세 시간의 만남과 확실한 이별이었다.

현상된 것은 사진만이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실 또한 함께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것처럼.
여행은 흩어진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
한 번 받아들인 이상 여행 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별도 그렇다.
이미 찍혀버린 장면은 삭제할 수 없다.
셔터를 누른 순간, 되돌림은 불가능하다.
얼마나 오래 빛을 받아들이는가.
내게 빛은 치유이면서도 몽롱함이고,
흐려짐이면서도 선명해짐이다.
나는 빛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필름 위에 새긴다.

여행을 마치며📔

이 책은 오토픽션이다.
작가 자신이 인물로 등장한다.
자신에게 빈에서 구매한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선언한 그녀 O.
그녀와 다시 한번 이별을 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빈에서 은반지를 던져버리기로 한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따지기보다 그가 보여주는 사건과 행동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또한 하나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문장을 쓰며 살아간다.
퇴색되어가던 의미를 다시 꺼내 나는 소설로 재구성했다.
당신도 잊혀가던 기억을 다시 소설로 써보고 싶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세상의 속도가 빛처럼 빠를 때 우리는 소설을 써야 한다.
소설을 쓸 때 우리는 잠시 멈춰 오래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붙잡고 싶을 때 네온 빛 사이로 지나가는 이 책을 선명히 포착하고 읽었으면 좋겠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것은 사진이었다.
인화한 필름 사진들은 마치 보호 기능이 없는 에어캡처럼
여기저기 소포 속 빈틈을 메우고 있었는데,
유독 어느 한 묶음만은 회색 종이봉투에 들어 있었고 봉투 겉면에는
독수림 그림과 함께 ‘ARMANI EXCHANGE‘라는 글자가 여전히 선명했다.- P16
그때 나는 왜 유럽에 가려고 했던 걸까?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한다.
90년대 후반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처럼 번졌던 것은 사실이다.- P21
일행의 여행 최종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지만
내 최종 목적지는 여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
반지를 버리면 그때부터 나는 자유다.- P97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서 나는 맨 첫 장으로 돌아갔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 소설에 어울리는 제목은 하나뿐이었다.
노트를 덮고 나는 머리를 뒤고 기댔다.
비행기가 서해 상공에서 진입하고 있었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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