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일 때다. 뉴스를 보는데 한국인의 평균 수명과 관련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뉴스를 보며 엄마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40년이면 내 나이가 80이 다 되겠네. 죽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욱신거리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엄마는 그 말씀을 우스갯소리처럼 하셨지만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꽤 충격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지금도 순간순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대체로 가족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은 왜 죽는지, 죽고 나면 정말 끝인지 죽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질문에 혼자 묻고 답하고는 한다. 이 책도 그 과정 중에 발견했다. 이 책을 알게 된 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평단을 신청하기 위해 네이버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다. 네이버 블로그에 서평단을 검색하고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을 때 다산북스에서 한국 인문학 시리즈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었다. 인문학 도서 여러 권이 있었다. 그중 맨 마지막에 소개된 책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책 제목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그렇다. 평소 관심 있는 주제인 죽음과 관련된 책이었다. 얼씨구나 바로 서평단을 신청했다. 저자인 김열규 선생님은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 궁금했다. 책이 배송 오자마자 읽어 보았다.
저자인 김열규 선생님을 소개하기에 앞서 내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여러 이유가 있는데 여기서는 김열규 선생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한국학 중에서도 민속학 연구의 선지자와 같은 분이었다. 6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인의 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다. 이 책을 통해서라도 알게 되어 부끄러움이 조금 가셨다.
책 제목이『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이다. 한국학 교수님이 쓴 책이라 제목도 당연히 우리말을 사용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하지만 메멘토 모리라는 말만큼 죽음을 잘 표현한 단어도 없으리라. 아마 저자도 메멘토 모리의 담긴 뜻이 이 책의 내용을 담기에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해 다룬다. 죽음 중에서도 한국인의 죽음에 대해 다룬다. 저자는 이 책을 ‘한국 인문학 영역 최초로 간행되는 죽음론’이라고 칭했다. 저자의 말처럼 인문학 영역에서 죽음을 다룬 책을 이 책이 최초다. 죽음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에게 딱 한 번 주어진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이는 빈부의 차이가 있건 성별의 차이가 있건 모두가 공통으로 겪는 체험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죽음만 따로 떼놓고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아보고자 한 건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 현장에 있는 죽음이 지닌 한국적 현장성이다. 이 현장성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책의 목차는 총 5부로 죽음을 나무에 비유하자면 각각의 목차는 나무에서 뻗어 나가는 가지와도 같다. 한국인의 죽음을 역사를 통해, 언어를 통해, 사회 모습을 통해 내밀하게 드러낸다. 먼저 역사를 통해 알아보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탈해 왕의 신화가 그렇다. 삼국유사를 보면 탈해왕이 죽자 사람들이 왕의 뼈를 부순 후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편히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탈해 왕의 신화는 당시에는 신체 전체를 매장했다는 점과 골장을 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다. 죽은 이의 뼈로 만든 소상 등에 관해서도 일러주고 있다. 탈해 신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신라만의 특색은 죽은 이의 뼈를 부수어서 빚은 소상이다. 신라인들은 탈해 왕의 ‘죽은 골상’을 섬긴 것이다. 이때 이 ‘죽음의 골상’이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에서 샤머니즘 적 이념을 따라 섬겨진 ‘온곤’을 연상케 한다. 이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 당시의 언어 관습 또한 추측해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을 두고 보자면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뼈와 살의 대비에서 뼈는 아버지에게, 살은 어머니에 걸려 있다. 이 말인즉슨, 뼈는 씨이자 아버지의 뜻을 의미하고 살은 밭이자 어머니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의 대비를 통해 당대의 사회가 가부장제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옛 어르신들의 말을 들어보면 뼈대 있는 집안의 몇 대 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이 아직까지도 쓰이는 것 보면 우리 사회가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였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죽음을 언어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부분이다.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이어서 그런지 언어를 다룬 부분에 조금 더 관심이 쏠렸다. 특히 죽음을 대유법을 통해 분류한 점이 인상 깊었다. 죽음의 대유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생태론, 떠나감, 종교적 이렇게 세 가지다. 생태론 차원에서 죽음은 생리현상이자 생체현상이다. 대유법으로 표현하자면 ‘숨지다, 숨을 끊다’로 표현된다. 다음은 떠나감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의 죽음관이 여기에 해당한다. 떠나감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으로는 ‘세상을 뜨다, 타계하다, 유명을 달리하다, 세상 등지다, 영결하다’가 있다. 죽음을 떠나감으로 놓고 본다면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가 국어시간에 고전 문학을 살펴볼 때 많이 나오는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넋’이다. ‘넋’은 영혼과 등가를 이루는 단어로 목숨의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몽주의 <단심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때 쓰이는 넋이 바로 지금 설명하는 넋과 같은 의미다. 이를 통해 한국인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층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짧은 서평으로 모든 내용을 대신할 수 없기에 인상 깊었던 부분을 자세히 적었다. 책에는 앞서 말한 내용 이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한국인의 죽음은 과거의 떠나감의 죽음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어릴 때 ‘무서운 게 딱 좋아’ 같은 만화책에서 보던 처녀 귀신, 총각 귀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또한 한국의 옛 장례 풍습에서, 시 속에서, 신화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인의 삶과 일상 속의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을 총망라해 보여준다.
나는 아직도 죽음이 무섭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죽음의 무서움이 달아나는 건 아니다. 다만 죽음이 무섭다고 덮어두지는 않으련다. 생각해 보면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서 평생을 산다면 그 삶을 정말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랬다면 아마 나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처럼 죽음을 다루는 책을 읽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쑥날쑥 떠오른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마 무시한 확률을 뚫고 세상에 태어났듯 죽음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삶 자체가 기적이듯 죽음 자체도 기적이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 존재하는 인생이라는 짧은 순간. 이 순간을 한바탕 놀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