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학계에서 오랜만에 무게감 있는 정치사 연구서가 나왔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고 한국사를 더 잘 아는 일본인 학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논문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위엄’은 참고문헌만 살펴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현대정치사연구에서 보통 활용되는 한국어, 영어(미국) 사료는 물론이고 중국어와 일본어 사료까지 섭렵했다. 활용한 연구 성과 역시 그러하다. 풍부한 자료의 활용을 통해 질 좋은 연구가 나왔다. 저자가 이 연구를 완성하는 데 들인 공력이 상당하니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가짐 또한 자못 진지해진다.
저자가 다양한 국가의 사료를 섭렵한 것의 진가는 ‘족청계’라는 정치세력의 이념적 기반(정치사상)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는 데에서 한껏 드러난다. 저자는 ‘족청계’라는 정치세력의 부침을 통하여 한국민족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구명하고자 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한국민족주의의 성격을 둘러싸고 상반된 시각이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탈근대주의’적 시각에서는 민족주의를 ‘상상의 공동체’라 호명하며 민족주의가 배제와 억압의 기제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민족주의가 민주화운동 및 평화통일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강조하며 여전히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이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민족주의와 관련한 ‘뜬구름 잡는 논쟁’들을 보며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는 독자라면, 또는 과연 한국민족주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세계사적 고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어떠한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한국민족주의의 전개 양상뿐 아니라 그 ‘기원’ 중 하나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한국민족주의를 둘러싼 커다란 의문 하나를 해소해준 것이다. 한국민족주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좋은 정치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정치세력의 활동과 그 의미를 따져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세력의 이념적 기반(정치사상)과 정치활동을 함께 분석함으로써 한국사의 전개에서 해당 정치세력의 존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했다. 한국현대사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나아가 현대사 연구에 뜻을 둔 학생이라면 반드시 소장하고 자주 펼쳐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