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조선에 살던 저자의 가족들이 조선을 떠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핍박하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어서 커다란 논란이 일었다. 일본이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각종 탄압을 일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학교들이 이 책을 교재로 채택하기 시작하자 재미 한인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한국사회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초등학교들이 다시 이 책을 교재로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우려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857294 (관련 기사 링크, 뉴시스 2012-12-02)
나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이 과연 얼마나 심각하게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은 패전 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혹은 미군이나 소련군에게 각종 핍박을 받았던 사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요코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인 북한 지역에 체류했던 일본인들은 남한 지역의 일본인들에 비해 더욱 큰 수난을 겪었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뜻으로 ‘요코 이야기’가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과도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재일조선인의 한국 귀환, 재조선일본인의 일본 귀환 문제를 다뤄온 저자가 이번에 펴낸 ‘조선을 떠나며’는 이러한 민감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대중서이다. 이 책에는 패전 후 재조선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던 여러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조선인들이나 일본인들이 겪었던 각종 경험들을 매우 상세하게 풀어냈다. 이 책은 본격 연구서가 아닌 이른바 ‘역사 논픽션’을 표방하는데, 당시 조선인들과 일본인이 겪었던 체험들에 주목하며 당대의 역사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그려진 수많은 인물들의 언행을 따라가다 보면 흡사 역사연구서를 읽기보다는 한 편의 이야기 모음집을 읽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역사 논픽션’이라고 이름붙인 것 같다.
이 책에는 패전 직후 조선총독부의 동향, 재조선일본인의 귀환 문제로 인해 불거진 조선의 경제위기와 조선인들이 겪은 경제적 곤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민감한 이야기는 역시 위의 ‘요코 이야기’와 같은 부류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귀환 과정에서 겪은 각종 ‘고생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현재 한국 대중에게는 매우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재조선일본인들의 ‘고생담’을 접하면서 다양한 감상이 생길 수 있다. 어떤 이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의 고통을 접하며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으로 인해 민중이 크나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을 것이다. 특히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일본인 여성들의 피해와 고통을 보면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 곳곳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식민지배의 대가와 패전의 부담을 가장 무겁게 짊어졌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반면 어떤 이는 ‘요코 이야기’를 비난하는 심성과 같이 ‘일본인들은 당해도 싸다’는 감상을 가지면서 쉽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에 살면서 식민지배에 일조한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패전 후에는 그러한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과 가족의 안위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군상들 역시 가감 없이 자세히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감상이 들 수 있지만, 일단 저자의 바람은 이 책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가해와 피해의 기억’의 단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결코 풀기 어려운 역사적 기억의 문제이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한국사회는 차분하게 식민지배가 한국인들과 일본인에게 미친 역사적 영향을 뒤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다. 가해의 책임을 진 일본정부가 사과하려 하지 않는 마당에 먼저 용서하겠다는 나설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최근 신내각을 출범시킨 아베 신조 총리는 오히려 가해 책임을 조금이라도 인정한 기존의 정부 공식 입장을 후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일 간에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청산 문제를 차분히 고민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