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구술사 연구의 현주소
자유로픈 2011/11/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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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 한국구술사학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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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11-08-09
: 381
구술사(oral history)는 우리에게 생소한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우리는 대부분 문헌기록을 토대로 한 역사서술을 접할 뿐이고 본격적인 구술사 연구는 찾기 어렵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옛날이야기'를 흔히 듣곤 한다.
구술사에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이야기와 우리가 밥상머리에서 듣는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면담자일 뿐이다. 충분한 지식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질문하는 연구자와 그냥 재미로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입장이 다를 뿐이다. 구술사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듣느냐이다. 구술사는 구술자와 면담자가 함께 쓰는 역사인 것이다.
구술자와 면담자(역사학자)가 구술사를 '함께 쓴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함의를 지닌다. 보통 역사학에서 사료는 '객체'이다. '주체'인 역사가가 사료들을 독해하고 분석하여 역사상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구술사에서 구술자는 '객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술사의 본령이 바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거듭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술사에서 역사가와 구술자는 '주체 대 객체'가 아닌 '주체 대 주체'의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야 한다.
역사가와 '사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기존의 문헌 중심 역사 연구와 구술사 연구는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방법론이 모두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구술자료를 생산하고 분석할 것이며,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하는가? 사료비판 방법과 글쓰기 전략 등 역사 연구의 기초부터가 모두 다른 탓에 구술사 연구는 결코 녹록치 않다. 모두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구술 기록을 모은 자료집이나, 구술 기록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연구서는 많은 편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구술사 연구방법론을 활용한 연구는 그리 흔하지 않다. 구술사 연구를 쉽게 풀어놓은 대중교양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서조차 손에 꼽을 정도이다. 내가 본 책 중에 박사학위논문을 출판한 것으로는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윤택림, 역사비평사, 2004)와 <월남민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 - 밑으로부터의 월남민 연구>(김귀옥, 서울대출판부, 2000),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이임하, 책과함께, 2010)가 있고, 연구논문모음집으로는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김귀옥 외, 선인, 2008)과 이 책이 있다. (내가 구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모든 연구서를 꼽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 책들이 주요한 연구서들임은 분명하다.)
위에 언급한 책들이 모두 중요한 연구들인데, 굳이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구술사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구술사학회를 창립한 후 처음으로 출판한 논문모음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현재 한국구술사 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내가 앞서 구술사에 관해 설명한 바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역사학 전공자에게, 이 책은 기대치를 충족하기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연구 소재가 다양하여 참고가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존의 거시사 중심, 문헌 중심 역사서술을 뒤집는 파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문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목소리는 생생하지만, 그 신선함은 기존 역사서술의 틈을 깨기보다는 메워주는 느낌이 강하다. 혹은 기존의 역사서술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 어긋남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해주지 못한다.
이 책에서 완벽한 구술사 연구방법론과 글쓰기를 소개하지 못한 책임을 저자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저자들 자신이 아쉬움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구술사 연구는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다. 구술사 연구를 위해서는 충분한 비용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느 문헌 사료들보다 수집과 정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 지원 체계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악전고투하며 구술사를 알려온 소수 연구자들의 덕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이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구술사 연구의 고민이 어떠했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연구 성과로서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구술사에 생소한 학생이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 책은 괜찮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민중이 겪어야 했던 피란, 학살, 전투, 일상의 경험들을 생생히 전하면서,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지에 관한 일면을 보여준다. 앞서 비판한대로 민중을 기존의 전쟁사 서술과는 완벽히 다른 역사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기존의 서술에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민중의 경험이 전쟁의 전체 국면과 엮이는 모습을 소상히 알려준다.
구술 기록을 주로 활용하면서도 기본적인 사실(史實) 해설을 빼놓지 않은 점은 이 책의 큰 미덕이다. 한국전쟁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주변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를 더욱 소상히 이해하며 실감나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구술자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등 주변 어르신들에게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한 번 청해보자. 비단 한국전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옛날이야기들은 분명 예전과는 달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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