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암살하라
자유로픈 2011/07/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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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이라는 스캔들
- 나이토 치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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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 2011-07-01
: 82
공부를 하다 보면 잠시 바쁜 눈길과 손놀림을 멈추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무엇을 하나? 보통은 머리를 쓰지 않는 다른 취미를 즐기면서 공부와 관련한 생각을 멈추고 뇌를 쉬게 한다. 혹은 다른 방법도 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자주 접하지 못했던 주제를 가벼운 기분으로 공부하고 경험해보며 자신의 평소 공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처럼 공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의 '휴식'이 때로 더 나은 경우가 있다. 비록 '귀차니즘'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는 못하는 방법이지만 말이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여름 장마 기간 동안, 일과 공부로 바쁜 와중에 왠일인지 귀차니즘을 뚫고 낮선 주제의 책을 읽었다. 아마도 선정적인 책 제목에 현혹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진지한 역사 연구서를 주로 출판하는 곳에서 제목만 보고는 내용을 짐작하기 힘든, 그러나 왠지 재미있을 것만 같은 책을 한 권 냈다. 언뜻 살펴보니 역사서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연구 서술이었고, 다룬 시공간도 근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었다. 현대 한국의 역사서술을 공부하는 내게는 주제와 시공간의 측면에서 여러 모로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마침 장마와 무더위로 늘어질 수밖에 없는 휴식 기간 아닌가? 나와 이 책의 만남은 때를 잘 맞춘 만남이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메이지 시대 일본(1868~1912)의 '미디어 공동체'가 갖은 '소식'들을 '제국'과 '남성'의 시선으로 '스테레오타입'화 시켜가는 과정을 젠더의 시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젠더의 시각에 입각한 문화연구는 1990년대 이래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에게는 낯선 분야이다. 나 역시 문화연구와 젠더 시각에 생소한 편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복잡한 함의를 가진 용어들과 낯선 서술 방식에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역사서술에서 흔히 활용하는 언론 기사들을 가지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엮어가며, 당시 미디어들이 만들어내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복원해나가는 저자의 글솜씨는 대단히 매력적이다.(번역의 질이 괜찮다는 뜻도 된다.) 낯선 용어와 묘사 때문에 독서 진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만든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가 대중화해가던 시기였다. 미디어 대중화의 시대에서 등장한 '미디어 공동체'는, '근대 문명=제국=남성=천황제'를 지고의 가치로 설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성립할 수는 없었고, 반대되는 '타자'를 계속 배제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었다. 그 타자란 바로 '전근대적 야만=식민지=여성=진보적 이념'이었다. '미디어 공동체'는 살의와 악의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의 희생물을 찾았다. 어떤 희생물이 등장하면, 미디어는 그것을 거침없이 공격하면서 이야기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물은 스테레오타입에 빨려들어가 고유한 개성을 잃고 사라진다. 그러면 미디어 공동체는 그 희생물을 망각의 늪 속으로 밀어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나선다.
저자의 서술에서 등장하는 희생물, 즉 '타자'의 표상은 매우 다양한 사건과 인물과 소재들로 이루어졌다. 시간적 흐름으로 놓으면 '위생 관념과 아이누의 멸망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 -> 여성들(황후, 창기, 여학생으로 구분되는)에 대한 시선과 각종 신문 광고들(주로 부인병 치료약과 화장품 광고) -> '민비'에 대한 미디어의 증오와 시해 사건 보도 ->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에 대한 시선 -> 한일병합에 대한 시선 -> 무정부주의와 '천황 암살 시도'에 대한 시선으로 이어진다. 언뜻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별개의 사건들이라고 여겨지지만, 저자는 미디어가 이런 다양한 사건들을 가지고 일관된 논리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사실 위에 언급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사례들인데, 그것들을 섬세한 설명과 묘사로 엮어냄으로써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저자는 당대 미디어들이 쏟아낸 악의와 살의에 찬 공격들을 헤치며 '타자'로서 배제된 '이야기'들을 복원해내었다. 위에 적은 사건들은 분명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완성되었지만, 스테레오타입에 흡수되어 망각된 것들을 떠올리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로 거듭난다. 저자는 당대에 완성되었던 이야기들이 미처 봉합하지 못했던 '균열'들을 세심히 살피면서, '이야기'를 '암살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해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문화연구 작업을 수행하면서 딱딱한 이론에 기대지 않고 분석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에 찰싹 달라붙어 분석했다는 점이다. 나와 같은 독자들은 문화이론은 생소하지만, 신문 기사와 같은 텍스트들은 익숙하다. 한국인 독자들은 이 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젠더의 시각으로 분석한 미디어 비평이 과연 어떤 것인지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문과 방송이 달리 보일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일본사회가 조선과 조선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일본 미디어가 명성황후, 김옥균, 안중근 등의 중요한 역사 인물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망각해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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