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 사회운동사
사회운동사(history of social movement)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이다. 사회운동사가 중요하다는 말은 곧 사회운동이 근현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이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그만큼 고생해왔다는 뜻이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친 민중의 역사가 곧 사회운동의 역사이고, 한국 근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멀리 보면 19세기 사회 혼란 속에서 터져나온 민란들과 갑오농민전쟁부터 시작하여,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해방을 목표로 삼은 갖가지 항일운동들이 펼쳐졌다. 해방 이후에는 독립의 완수를 위하여 다양한 노선의 정부수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 이후, 백색독재가 군림하는 남한 사회에서는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펼쳐진 사회운동에 관해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아울러 '민족민주운동'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모든 사회운동들이 공통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점을 중시하여 '민주화운동'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근현대 100여년 동안 한국인들이 전개해온 사회운동은 단순히 정부 영역이나 사회 영역의 개량 및 개선을 추구하는 성격의 시민적 운동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대로 된 국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성격의 운동이었다. 조선시대 말 개항기에는 나라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반외세나 반봉건 등 다양한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꿈꾸었고, 일제 시기에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해방 이후에는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각자의 노선에 따라 정부수립운동을 벌였고, 분단된 이후에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독재정권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근현대 100년 동안 한국인들은 잇단 전쟁과 지겨운 빈곤에 고통받으면서도 식민지배와 독재라는 무거운 역사의 짐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 사회운동사가 그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전형적 사회운동사 서술로서의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이 책은 전형적인 사회운동사 서술로서,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다루었다. 이 책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판된 책인데, 전작 중에서 시대별 통사를 다룬 책으로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서중석),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조희연)가 있었다. 전자는 역사학자의 본격적인 정치사 서술이고, 후자는 저자가 사회학자이기 때문인지 정치, 사회, 경제, 사회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엮어 박정희 정권 시기의 시대상을 그려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의 정치학계에서는 드물게도 역사적 접근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학자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1980년대 한국 정치의 흐름을 역사 서술의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사실 이 시기의 사회운동사를 다룬 서술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시기였던만큼,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나 저술가들이 1980년대의 사회운동을 다루었다.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을 터인데, 학계에서 정리한 가장 대표적인 저술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돌베개, 전3권, 2008~2010)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리즈 중 3권이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다루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민주화운동사> 3권의 축약판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3권에 저자 정해구 역시 집필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시각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3권은 대중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교과서'이다. 분량도 1,000쪽에 달하는 만큼 내용이 아주 자세하다. 그러므로 대중이 편하게 접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인데, 이 책은 '엑기스'만 뽑아내어 대중서로 엮은 셈이다. 매우 복잡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간명하게 드러내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꽤나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이 책은 학계가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사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이 1960년 4월혁명의 경험을 계승하여 독재 타도와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서 전개되었고, 1970년대 태동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주된 동력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1980년대에는 역사적 대세가 된 민주화 요구를 짓밟고 독재를 연장시킨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운동이 더욱 조직화되고 확산되는 경과를 거치게 된다.
대학생들과 일군의 재야인사들이 '1980년 5월 광주'의 슬픔을 딛고 선도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나갔고, 시대의 대세를 알아차린 제도정치권의 야당 세력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윽고 정권의 폭압에 기가 질린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각기 사상과 노선, 정치적 지향이 모두 달랐지만, 민주화라는 당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같은 '최소 강령'에 합의하고 폭넓은 연대를 이루어 정권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결국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로써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들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개헌이 최대 이슈로 부상함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은 삽시간에 시민사회에서 정당정치 영역으로 옮아갔고, 본래 온건 노선을 견지했던 보수야당 세력은 재야세력과 결별하고 신군부와 타협했다. 게다가 대선 정국에서 보수야당의 두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권력투쟁 끝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결국 신군부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처럼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독재의 잔재가 철저히 청산되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 위한 많은 과제들이 1990년대 이후로 넘겨졌다. 저자는 이러한 1980년대 민주화의 빛과 그늘에 관한 학계의 기존 평가들을 수용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간명하게 풀어놓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회운동사 서술이고 대중서라는 취지에 맞게 구성 방식도 대단히 평이한 수준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과 1980년대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은 486세대들은 추억을 회상하며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반독재 민주화의 가치를 긍정하는 학계의 시각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저술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486세대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볼만한 점들
이 책은 분량의 제한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모든 테마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대중서로서 가지는 불가피한 한계라 볼 수 있는데,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기 위해 생각해볼만한 점들을 몇 자 적어본다.
먼저 각종 운동과 사건의 용어 문제이다. 저자는 '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어떤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곧 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독자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 나름대로 해당 사건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음미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80년 5월 광주'의 사건을 보는 시각은 '민중항쟁론'과 '민주화운동론'으로 대별된다. 현재 국가가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시각은 후자인 '민주화운동론'이다.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을 치르고 있다. '민주화운동론'은 사건의 성격에 관하여 국가와 일부 타협한 측면이 있는 시각인 반면, '민중항쟁론'은 보다 급진적으로 해석하려는 시각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에 유의하며 책을 읽으면 더욱 풍부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인의 다른 글(링크)을 참조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에서는 본문의 중간 중간에 미국의 동태를 설명해놓고 있다. 민주화 이전에 미국이 한국 정치에 미치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국은 남한이 계속 반공 체제를 유지하길 희망했고, 그러한 견지에서 완고한 반공 성향을 보이는 독재정권들을 용인하고 나아가 지원하기까지 했다. 1980년대에도 미국이 전두환 정권과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용인하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 심각해지는 국면을 지켜보면서 결국에는 전두환 정권에게 민주화를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즉 한국사회의 민주화 이행에는 미국의 정책 변화 역시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적시되지는 않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운동사 서술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문제가 자세히 다뤄지기 힘든 측면이 있으므로, 독자는 이를 감안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놓치면 한국사회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 특히 반미운동과 통일운동의 대두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치지도자가 이끈 보수야당의 문제이다. 민주화와 이들 야당세력의 관계를 따지는 문제는 다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들 두 지도자와 야당이 당시에 보여준 행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며 독서하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야당세력의 분열은 명백한 정치적 퇴보였는가? 아니면 불가피한 변화였는가?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지역주의의 등장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러한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이 매우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