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추모의 의미로 내가 읽었던 그의 책을 소개해본다.
오마이뉴스 등 진보적 언론매체에서 가끔씩 그의 근황을 알려주는 기사를 내왔기에 그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지만, 역시 절필을 한 지 오래인지라 그의 '존재감'은 예전에 비해서는 퇴색한 감이 있다. 아마 현대사에 관심이 적은 젊은 세대라면 리영희라는 인물이 왕년에 얼마나 '미친 존재감'을 과시했었는지 실감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무식한 냉전반공주의가 횡행했던 민주화 이전 남한사회의 지성계는 당연히 좌우를 넘나드는 다양성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러한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찾아 읽어볼만한 무언가 '쌈빡한' 책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과거 기록들을 보면 "'이 책'을 들고다니지 않으면 제대로 된 학생 취급을 받지 못했다"라거나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또래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따위의 회고를 자주 접할 수 있다.
1960년대에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책이 단연 정론지 <사상계>였다면, 1970년대의 주인공은 역시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니 1974년 출판된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였는데, 출간 2년 후까지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었다.(매일경제 1976.8.10) 경향신문의 집계로는 1980년 현재 약 3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경향 1980.2.7) 같은 시기에 펴낸 다른 책들까지 더하면 대단한 판매 부수였다. 금서로 탄압받았던 사정까지 고려하면 경이적인 인기였다고 할 수 있다.
리영희 당신이 쓴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유신체제 속에서 분통만 터뜨리던 청년들은 이 책들을 읽고나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충격을 받았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베트남전쟁에서 보여준 어두운 그늘, 격동하는 세계정세와 한국의 위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각 등을 접하면서 감겨 있던 한쪽 눈을 뜰 수 있게 된 것이다. 리영희의 저술들은 유신체제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문자 그대로 '필독서'였다. 프랑스 언론 <르 몽드>는 그를 일컬어 '사상의 은사'라고 했고, 공안당국은 그를 일컬어 '의식화의 원흉'이라 했다.
공교롭게 최근 연평도 사태의 와중에서 나는 리영희라는 존재를 자주 상기하곤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북괴(北傀)'라는 용어 때문이었다. '북괴'는 대략 '북한 괴뢰(傀儡)'의 준말로, '괴뢰'는 '꼭두각시'라는 의미이다. 즉 '북괴'는 '꼭두각시 북한'이라는 의미인데, 곧 북한은 주권을 지닌 국가가 아니라 소련의 조종을 받는 정치집단, 국가라고 해도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담긴 용어이다.
지금은 '북한'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지만, 독재정권 시절에는 '북괴'가 더욱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오히려 '북한'이란 표현을 쓰면 '휴전선 이북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괴뢰집단'을 인정하는 뜻이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신문지상에서 '북괴'란 표현을 쓰지 말고 '북한'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고 적극적으로(아마도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그는 단순히 북한을 인정해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만으로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1968년 발생한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분석하면서 북한이 단순히 소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진실에 민감한 언론인이었고, 당연히 '북괴'라는 '정치적으로 안전한' 표현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북괴'라는 용어를 폐기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상'에 도전했다. 그리고 탄압받았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그의 도전이 역사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이번 연평도 포격 사태로 이글루스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중 자제심을 잃은 몇몇 블로거들이 '북괴'라는 용어를 애용하고 있었다. 나는 21세기도 10년이 다 지나가는 시대에 이러한 복고풍의 단어를 접하면서 새삼스레 리영희라는 존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그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나는 리영희의 저술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나마 그중에서 정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 최근에 출판된 <대화>이다. 이 책은 리영희와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대담집이다. 리영희가 병으로 쓰러진 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펜을 잡기 힘들어지자, 그를 잘 아는 임헌영의 도움을 받아 구술 대담의 형식으로 풀어낸 자서전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은 리영희의 인생역정을 담담히 풀어내면서 그의 신념과 사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었다. 대담의 형식이므로, 조금만 집중한다면 마치 그와 실제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나는 이책을 읽기 전까지는 리영희에 대해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하고 깐깐한 지성인의 이미지였다. '이성'으로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식의 엄격한 논리들을 접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자서전이라는 형태 덕분이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선입견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엄격한 논리와 분명한 사실을 중시하는 언론인이었고,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지성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엄격한 면모 속에는 시대의 부조리에 가슴 아파하는 역동적인 감성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이성을 중시한다고 '우상'에 저항하는 용기가 절로 생기는 법은 아니다. 모든 엘리트가 '우상'에 저항하지는 않는다. '우상'에 저항하고 독재에 맞서 자유를 지향하는 용기는 분명 격동하는 분노가 서리지 않으면 쉽게 생기지 않는 태도이다. 이 책은 리영희가 외부의 억압과 내면의 불안에 굴하지 않고 시대의 부조리를 가슴 속에 갈무리하며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태도를 가다듬어 나가는 삶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을 사는 언론인의 사표를 접하는 느낌(이를테면 어떤 정부관료가 리영희를 들먹이며 출입기자들을 비판한 에피소드 등)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에 기자 지망생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책이겠지만,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리영희 가라사대' 운운하는 세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남긴 유산에서 자유로운 세대는 결코 아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있었던 전쟁들을 이야기할 때, 미국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독재정권들을 이야기할 때,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한겨레나 조중동 등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만드는 논리는 찬성 쪽이건 반대 쪽이건 그가 시대를 살면서 만들어낸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따위의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곧잘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는 명제들이 한국사회의 지성계에서 발을 붙여온 과정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북괴'란 용어가 버젓이 통용되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지식인에 대한 최고의 추모는 그가 남긴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를 잘 모르거나 그에게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배우는 젊은이의 처지라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정말로 극우적인 축을 제외하면) 진보에게든 보수에게든 리영희는 딛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가교와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출처:
리영희를 추모하며 - <대화>(2005, 한길사)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