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책입니다. 추천할만한 책이라 생각해서 소개글 올려봅니다.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섭렵해야하는 책들을 꼽다보면 정통 역사학자들의 저술보다는 정치학이나 사회학 연구자들의 저술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한국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을 비단 역사학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계열의 연구자들도 적극적으로 해 왔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불어닥친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의 영역만은 아닌 것은 당연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연구가 부진했던 상황 속에서 워낙 드러나야할 사실들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연구는 분과를 막론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사료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진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현대사연구의 부문별로 해석의 일정한 차이를 보이곤 했습니다.
한국현대사연구의 다양한 부문 중에 정치사 부문은 역사학자들보다는 주로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본래 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는 임무가 정치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정치학자들이 분석해야 할 것인데, 워낙에 역사학의 연구성과가 부실했던 탓에 사료발굴과 역사해석까지 시도해가며 연구를 해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정구, 박명림, 최장집 등의 저술들을 읽다보면 이 글이 역사저술인지 사회과학저술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다릅니다. 거칠게 간단히 구분하자면,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은 연역적이지만 역사학의 연구방법론은 귀납적입니다. 사회과학저술의 맨 처음에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현상을 그 이론 틀에 따라 분석하고 체계화시킵니다. 하지만 역사서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소한 지금 우리가 따르는 근대역사학은 틀을 세우기에 앞서서 실증이 우선합니다. 사실들의 연속을 따라가면서 그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저술의 결론은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쌔끈함을 보이지만 역사저술의 결론은 뜬구름잡는 내용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사실의 나열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역사학에서의 史觀은 어느 한 대가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고 여러 연구자들의 제안과 비판 속에서 체계화됩니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는 아직은 연구성과가 충분치 못하여 어떤 사관이 확립되어 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관통하는 사관은 고사하고 대한민국사만을 관통하는 사관조차도 확립되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한국현대사를 보는 대다수 전문연구자들의 관점은 역설적으로 '한국'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관점이기도 한 현실입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사관으로 그나마 인정되어 왔고 영향력을 지녀온 것이 이른바 '분단극복사학'입니다. 강만길이 1978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내면서 논쟁이 촉발되었고, 지금은 '역사적 시의성'을 인정받아 많은 지지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던 것을 지금은 '민족해방운동'이라고 많이 부르게 된 것을 보면 분단극복사학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은 한국사/민족사관 전체를 아우르기 힘들다는 결함이 있지만, 근대사의 민족해방운동에서 현대사의 민족민주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고 21세기 들어 통일작업이 진전되는 현실에서 '역사적 시의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은 일제시기의 좌우익진영이 벌인 갖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을 궁극적으로 '해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끝내 '해방된 민족국가'는 건설되지 못했습니다. 두 분단국가의 성립은 진정한 '해방된 민족국가' 건설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고, 분단국가의 후손들은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떠맡게 된 것입니다. 그 미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바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민주운동의 역사인 것입니다.
저는 분단극복사학의 이러한 관점이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 긍정합니다. 그러나 결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일인데, 최근 뉴라이트의 역사해석에 관한 문제제기로 인해 이 결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분단극복사학의 결점은 앞서 언급한 민족사를 통사적으로 체계화하기 힘들다는 점 외에도, 한국현대사를 바라봄에 있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폄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사를 '미완의 역사'로 보는 데서부터 이미 출발하는 문제입니다. 민족해방운동에 최상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흐름을 국가의 권위주의독재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인 민족민주운동으로 연결하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찍어눌렀던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재를 폄하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뉴라이트의 문제제기는 그런 점에서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라고 묻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87년 민주화를 전후해서 태어난 젊은 세대는 분명 사고의 중심에 '대한민국'을 놓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폭넓게 확산된 '대한민국'이란 구호는 국가의 정체성을 북한과 상대되는 휴전선 이남의 '남한'으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을 그대로 직시하는 경향을 전면적으로 보여주었던 징표입니다.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은 분명 자랑스러워 할만한 여지가 있는 국가인데, 도대체 뭘 자랑스러워 해야하는 건지에 대한 문제는 미묘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민주화를 일궈냈던 386세대가 제도권정치에 진출했다가 욕을 얻어먹으면서 더욱 복잡하고 미묘해졌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뭘 자랑스러워해야하는 거지?라고 말입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꿰뚫어보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이어야하는지 정확히 파악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혼란한 시국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신념을 견지하여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활동을 벌여냈고, 그 성과로 건국된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지향할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국가체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워할만 하고, 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업적을 이어받아 그놈의 '선진화'로 나아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뉴라이트의 희망과 자존감이 넘치는 역사인식에 반해 지금까지의 한국현대사 연구는 대한민국사를 '고통과 고난에 찬 부끄러운 역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좀 매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는 반대와 저항을 외치다가 희망을 발견하는데 너무 인색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현대사에서 뉴라이트의 '저열한 희망'이 아닌, 어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사를 '미완의 역사'로 보아 제도정치사를 별로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결국 현재 한국정치의 발전에 큰 폐해가 되고 있는 정치혐오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 분과에서의 현대한국 정치사/사회사 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인문학적 감수성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야흐로 역사학은 제도정치와 민중의 삶이 상호관계를 맺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떻게 대한민국이란 국가체제가 진보의 희망을 키워올 수 있었고 민주주의를 지켜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할 때인 것입니다. 저들이 설파하는 '선진화'는 결코 그들의 주장을 따라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론격의 글이 너무 길었습니다. 서중석이 쓴 이 책은 비록 전문연구서로선 아니지만 정통 역사학자가 현대한국의 정치사를 전면으로 개괄한 거의 최초의 저서입니다. 사회과학자들이 이런저런 서구의 이론들을 가져다가 한국정치의 흐름을 분석하고 체계화시켰지만, 한국현대사의 역동성을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도의 변화만을 보지 않고 실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갔는지에 대해 연구해야 하는 역사학의 본령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전문연구서가 아니라 서중석이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주최한 <선거로 본 한국현대사>대중강의에서 강의한 결과를 편집한 전형적인 역사대중서입니다. 문체도 강의한 그대로로 적고 있어 읽기가 편하고, 그래서 서중석 특유의 입담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중석은 대한민국의 선거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어떤 면에서든 민중의 진보를 향한 열망이 표출되었던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을 파악하는데 있어 완전히 제도정치와 단절된 채 진행되었던 민족민주운동의 성과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의 향배로 인해 제도정치가 출렁였던 측면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60년 4월혁명, 유신체제의 붕괴, 전두환정권의 붕괴 등의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선거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박노자의 평으로 대신합니다. 아무래도 박노자가 보는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요.^^;;
"지역주의 선거, 금권선거, 혹은 관권선거라고 해서 선거를 '더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거라는 정치 메커니즘의 그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관의 개입이 없는 민주적 선거제도를 이룩한 한국 민중의 힘은 경이롭습니다. 물론 아직도 산 넘어 산이지만, 서중석 교수의 이 책은 선거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는지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서중석은 어느 인터뷰기사에서 진보정당의 분열을 아마추어리즘이라 비판하며 "진보세력은 현대사 공부를 좀 하라"고 질타했습니다. 한국현대사, 현대정치사의 흐름을 알았다면 분열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암튼 그는 앞으로 한국정치가 어떻게 진전되어야 하는지 올바른 전망을 가지려면 한국현대사, 특히 정치사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 책의 서평에서 정치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유권자의 민심을 다루는 부분이 너무 소홀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서중석의 의중을 짐작한다면 그리 나쁘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으려면 기존 한국현대사 연구의 내용들을 어느 정도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사, 사회운동사 부문에 대한 지식이 좀 있으면 책 속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이 좀 부족하다 해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별다른 부담 가지지 말고 읽어봐도 좋을 듯 합니다. 분량도 250쪽 내외라 읽기에 부담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선거이야기가 이렇게나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만 해도, 아무리 더러워도 정치라는 것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할 수만 있어도 자신의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에서 언급한 참고 기사들
책 서평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2381
서중석 인터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