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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픈님의 서재
  • 전쟁과 사회
  • 김동춘
  • 16,200원 (10%900)
  • 2006-11-30
  • : 2,007
1. 한국전쟁을 둘러싼 기억투쟁

역사는 공동체의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역사적 현상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교육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역사적 기억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때, 비로소 '사회통합'을 운위할 수 있게 된다. 같은 것을 기억해야만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여러 역사적 기억 중에서도 전쟁은 가장 고통스런 기억이다. 같은 공동체의 소중한 이웃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웃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어야 했던 '내전'의 기억이라면 더욱 고통스럽다. 고통은 치유해야 하고, 더욱이 전쟁으로 겪은 고통은 반드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의 고통은 치유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마음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기합리화'를 해야만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살아있는 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 두려움을 감내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자기합리화'를 어느새 '진실'로 착각하며 마음껏 떠들고 다닌다. 그런 식으로 고통의 '진실된 기억'은 잊혀 간다. 고통은 치유되지 못한 채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 간다.

한국전쟁 60주기이다. 전쟁을 일으켰던 이들은 모두 죽었고, 전쟁에 휩쓸렸던 이들도 이제는 서서히 퇴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고통은 고스란히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며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통을 잘 느끼기가 힘들다. 아프긴 아픈데 왜 아픈지도 모르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중은 자신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채 이야기해주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자신의 형제가, 부모가, 둘도 없는 친구가 죽어나간 그 고통을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미처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가해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현실에서, 저놈이 내 소중한 이를 죽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순간 자식과 손주 역시 가해자의 감시 대상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는 우리들에게 한국전쟁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 고통을 치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전쟁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자유로워져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먼저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온 그 상처, 가해자가 드러내지 말라고 협박하는 그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만만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60년이 지나도록 치유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상처는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치유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우리는 전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느 실천하는 연구자가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해 민중과 대화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왔다. 도대체 한국전쟁은 무엇이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나.

2.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학계에서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전통주의 시각과 수정주의 시각이다. 이 두 관점은 전쟁의 기원과 발발 책임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전통주의 시각은 냉전 초기부터 미국과 남한을 비롯한 '자유진영'에서 공유해온 시각으로서, 우리는 평화를 추구했는데 적화 야욕에 불타는 소련이 북한과 중공을 데리고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는 관점이다.

수정주의 시각은 1970년대 미국 학계가 베트남 전쟁을 목도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진 성격을 재검토하면서 등장했다. 미국은 냉전에서 결코 평화를 추구하며 방어적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진영'에서 이탈하려는 동맹국의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을 벌였다. 기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대등하게 대결하는 구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수세에 몰려 고전하는 입장은 소련이었다. 이러한 수정주의 시각에서 소련이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이미 전력차가 확연한 상태임을 양측이 빤히 알고 있는데 열세에 놓인 소련이 전쟁을 도발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소위 '남침유도설'이다. 미국이 함정을 팠고, 소련이 냉큼 달려들었다는 주장이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 기밀문서들은 전쟁을 일으킨 측이 공산진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전쟁을 선도적으로 주장한 이는 북한이었고, 소련과 중국은 떨떠름해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소련이 주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소련이 전쟁 발발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되, 아무튼 전쟁 발발의 책임이 공산진영에 있다는 것은 명확해졌다고 주장하여 자유진영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런 관점을 이전의 전통주의와 구별하여 신전통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위와 같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접하면서, 뜬금없게도 질문부터 다시 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기원, 전쟁 발발의 책임을 밝히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가'보다 '전쟁 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의 후유증은 이런 문제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기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은 미국의 관점에서 미국의 이익을 논하는 성격이 짙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미국인'의 관점이 아닌 '코리언'(남북 민중을 아우르고자 사용한 표현이다)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한다.

3. 한국전쟁의 역사적 기원과 그 성격

저자는 역사학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이 '내전'으로 발발하여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일단 중요한 부분은 전쟁이 '내전'으로 시작되었다는 평가이다. 한국전쟁은 우리가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상상하는 것처럼 북한이라는 '국가'와 남한이라는 '국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비록 1948년에 남북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했지만, 남북 양쪽 모두 자신들의 국가가 온전하지 않은 '반쪽국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분단은 부자연스런 상태였고, 반드시 통일되어야 했다. 하나의 민족이 두 국가로 갈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분단된 국가의 두 지도자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민족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왠일인지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외쳤다. 이승만은 선제공격을 바랐지만 국력은 약했고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의 욕망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원조의 수준을 낮추어 국방력을 약한 상태로 놔두었다. 반면 김일성은 민주개혁을 급속하게 추진하며 체제를 상대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고,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뚱에게 자신의 확신을 전달하며 지원을 촉구했다. 공산진영의 두 지도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남침을 승인했다.

저자는 1948년 분단 이후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이 불가능했던 이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결국 전쟁의 기원 문제가 분단의 기원 문제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해방/점령 직후 민중은 혁명의 욕구를 분출시켰다. 그 혁명의 요구는 식민체제를 청산하고 봉건제를 타파한 민주적 근대민족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남북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점차 해체되어 갔다. 소련과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맞는 국가를 한반도에 수립하고 싶어 했고, 그 목적에 따라 개혁을 실시해 나갔다. 

남북에서 개혁을 추진해 나간 외세와 주도세력은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않았다. 한반도 도처에서 반대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폭력이 난무했다. 1947년 말 분단이 현실화했을 때 이미 서로 간의 증오는 갈 데까지 간 상태였고, 오직 극소수의 양심적인 사람들만이 평화통일을 실천하고자 했다.

1948년 남북에 분단정부가 수립했을 때, '사실상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남북의 권력집단은 자신의 통치 지역 안에서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않기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씨를 말려버리기 위한 탄압에 몰입했다. 해방/점령 직후 1950년 6월 25일 '전면전' 발발 직전까지 불과 5년 여의 시간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무려 수십 만 명이 갖가지 형태의 폭력으로 죽었다. 최후의 평화통일 운동이었던 남북협상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 상황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것은 식민체제를 청산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적 열망의 슬픈 귀결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전쟁이 좌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남북이 지향한 서로 다른 '국가주의'의 충돌이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국가주의의 충돌로 평가한 선각자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는데, 여기에도 실어본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38선의 비극은 멸망해가는 국가주의의 고민이다. 남북 분열의 책임은 국가주의에 있다.(함석헌, 「내가 맞은 8.15」, 『함석헌 전집 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1984, 278쪽. 이 책 95쪽에서 재인용)

4. 이 책의 구성과 내용 - 한국전쟁 중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저자는 전쟁의 진정한 피해자는 원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생존을 위협당한 남북의 '민중'이라고 본다. 가해자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혹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남북의 권력집단이다. 이 책의 본론은 2장 <피란>, 3장 <점령>, 4장 <학살>로 구성되는데, 저자는 본론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이 서로 다른 의도를 가졌으되 공히 민중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내모는 양상을 지적한다.

2장 <피란>의 분석 초점은 전쟁 중 이승만이 보여준 행태이다. 이승만은 전면전 발발 직후 우왕좌왕하다가 민중을 속이고 탈출로까지 끊어버린 채 황급히 도망친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마땅히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임무를 내팽개친 것이다. 이승만은 기실 민중을 주권자로 보지 않는 오만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게다가 그는 오직 미국에 의지하여 국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애초에 냉전 대결로 인해 벌어졌다고 주장하며 미국을 탓했다. 그리고 북한에 속절없이 밀린 것도 미국이 안보 공약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들의 피란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도 미국에 돌려버렸다. 이러한 이승만의 인식은 그 배경이야 어찌됐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오직 미국의 참전을 보장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고 국민을 위무하는 데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승만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쟁 중 남한의 국민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피란민과 잔류민이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을 때, 이승만은 잔류민들에게 피란시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잔류민들을 인민군에 부역한 '빨갱이'들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검속에 나섰다.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민주국가의 지도자답게 민중을 보호하고 사회를 통합하면서 국가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버려둔 잔류민들을 오히려 '빨갱이'라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배제하면서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3장 <점령>의 분석 초점은 전쟁기 북한의 점령정책이다. 북한의 권력집단은 해방/점령 시기 혁명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민주개혁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반대세력을 포용하면서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다. 북한은 국가를 건설하면서 불가피하게 소련식 모델인 국가사회주의체제('일상화된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체제는 사회정의를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도외시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점령과정에서 북한은 비록 선의를 가지고 민주개혁을 추진했지만, 혁명과 전쟁이 뒤엉킨 혼란스런 상황에서 그 선의는 거의 드러나지 못했다. 인민군은 나름대로 규율을 지키며 지역을 통치했지만, 통치의 체계인 국가사회주의적 방식(인민재판, 농지개혁 등)은 다급한 전쟁 상황에서 더욱 억압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은 급속한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에는 통치력이 닿지 않았다. 민중은 자유가 억압되고 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에 빌붙은 일부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는 위축된 민중을 더욱 고통스럽게 괴롭혔다.

4장 <학살>은 남북 권력집단을 동시에 분석 초점으로 삼는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보는 정치사회학적 관점(클라우제비츠의 논의 등)에 의한다면 적대세력을 모조리 섬멸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전쟁과 혁명이 결합된 내전이 전개되면서 반대파를 살려두지 않는 방향으로 흘렀다. 서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증오는 이미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커지고 있었다. 북한 권력집단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안달이 났었던 악질 친일파들이 남한 국가의 권력을 잡은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승만을 비롯하여 친일파가 주축을 이룬 남한 권력집단은 정부 수립 후에도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민중은 친일경찰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도처에서 저항했고, 북한은 38선 근처에서 군사적 도발을 걸어왔다.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공주의를 동원하며 '빨갱이'라는 내부의 적을 만들기에 부심했다. 전선이 톱질하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긴박한 전세 속에서 남북의 권력집단은 갖가지 방법으로써 많은 민중을 부역자라고 간주하고 학살했다. 특히 민중 전체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컴플렉스'는 이승만이 더욱 심했다. 전쟁 초기에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는데, 이때의 희생자 수만 해도 최소 20만 명에 달했다.

저자는 전쟁 중에 벌어진 이같은 참혹한 일들이 전후에 구조적으로 정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구조를 '피난의 정치', '희생양의 정치', '무책임의 정치', '부역자 처벌의 정치', '학살의 정치' 등으로 다양하게 개념화한다. 이러한 구조들로 인해 현재 한국사회의 권력집단은 반대파를 툭하면 '빨갱이'로 몰며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리려 하고,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치는커녕 공익을 도외시하고 오직 사익만을 추구하는 정치 행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이러한 반동들이 한국전쟁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결론에서 저자는 한국사회가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국가의 관점이 아닌 민족의 관점, 더 나아가 인권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밝힌다.

따라서 공식 해석에 대한 비판인 이 책에서는 전쟁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적'을 섬멸한다는 명분 하에 남북한 주민들에게 어떠한 일들을 하였는지, 피란 과정에서 '국가' 그 자체였던 이승만은 국민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조명함으로써, 그동안 무시되고 억압받아 온 사실들과 기억들을 되살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공식화되지 않은 기억들, 곧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피학살 민간인과 불의의 죽음을 당한 말단 병사들, 전쟁 와중에서 다치고 상처받고 재산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그들의 '상처받은 몸'을 통해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려 하였다. 그것은 곧 국가의 관점이 아닌 민족의 관점, 더 나아가 인권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386~387쪽)

보론 - 용어 문제

이 글에서는 '6.25' 대신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전쟁과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전자는 전쟁 발발의 시점을 강조한 용어이고, 후자는 전쟁이 벌어진 지역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은 복잡하다. '6.25'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전쟁을 바라보는 전통주의적(반공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는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하면서 발생했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살폈듯이 전쟁은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6.25는 그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한 날짜이다. 전쟁을 총체적으로 고찰하기에는 불충분한 용어이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용어 역시 불만이 있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전쟁을 바라본 용어이기 때문이다. 주로 미국 학계에서 쓰는 'the Korean War'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경우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어디 한둘인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현실에서 다른 적당한 용어를 금방 만들기는 어렵다. 다만 반공주의적 시각은 하루빨리 탈피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학계에서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이 글에서도 그런 관점에 입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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