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눈팔기다
눈 덮힌 하얀색의 세상
˝세상은 그 많은 눈의 무게에 눌려 축 처져 있었다.˝
굽어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한눈을 팔게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도둑>은 그런 이야기다.
죽음의 신에게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한눈팔기‘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영혼들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 죽음의 신에게도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냉혹하고 서늘하고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죽음의 신, 이 책은 적어도 그런 생각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책의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다. 나치 독일의 어느 한 도시,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그 속에 사는 독일인의 일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의 참혹한 면을 상상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전쟁 속의 피해자는 어느 한쪽에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또 한 번의 진실에 맞닥뜨리는 책이었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책은 2권이라는 분량 만큼 무겁다면 충분히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작가 마커스 주삭은 지나치게 이야기를 무겁게 몰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책도둑인 소녀의 행동보다 어른들의 세상은 더 나빴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은 오히려 세상을 도둑질 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현실에 대한 모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 앞에 일어나는 누군가의 불행과 아픔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주는 공포와 처절한 상황은 아이들의 현실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소녀는 말의 의미를 배우면서 말의 힘을 느낀다. 또 그런 말의 힘을 원망한다.
˝인간 존재의 모순됨의 또 다른 증거였다. 이만큼의 선이 있으면, 이 만큼의 악이 있다. 그냥 물만 붓고 섞어 주어라.˝ p243
죽음의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음의 신은 소녀가 그녀의 양부모가 될 사람들을 향해 가고 있는 기차 속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기억을 떠올린다. 동생의 죽음, 이 비극앞에서 죽음의 신과 소녀의 첫 만남은 이루어졌다. 죽음의 서늘함을 소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소녀는 처음으로 < 무덤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도둑질한다. 리젤 메밍거라고 부르는 이 소녀를 죽음의 신은 ‘책도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죽음의 신의 장점인 ‘한눈 팔기‘는 이 소녀에서 시작된 것이다. 소녀와 죽음의 신의 교차는 한 번이 아니었다. 죽음의 신은 소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책을 수백 번이나 읽으면서 그 아이가 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살아남아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자리를 채워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죽음의 신의 호기심은 소녀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의 신에게 소녀의 존재는 가치있는 기억으로 그에게 영원히 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남은 기억을 꺼내어 죽음의 신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뮌헨의 도시 외곽 지역 힘멜이라는 곳에서 양부모랑 살게 된다. 동생과 소녀를 맡는 대신 이들 부부는 약간의 수당을 받을 터였지만, 동생은 오는 도중에 죽음을 맞이 해야만 했다. 결국 소녀만 양부모 밑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양부모 한스 후버만과 로자 후버만
한스 후버만은 제 1차 세계대전 부대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살아 남았다. 그는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년의 시간에서도 죽음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운이 제법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소장품이 있었다. 아코디언이다. 전쟁 내내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아코디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친구의 유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우기도 했다.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코디언은 한스 후버만의 친구이자 삶의 의미였다. 시간이 지나 그의 아들 막스를 도와야 하는 의무감도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스에게 막스는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렇게 유대인 막스는 한스의 집 지하실에서 오랜 시간 보호를 받게 된다.
한스 후버만의 일은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공정성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였던 에릭 판덴부르크는 유대인 독일인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였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는 히틀러를 따르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기에 독일인이지만 히틀러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 참혹하고 냉정한 전쟁 속에서도 그는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쟁 말 독인이 전세에 밀려 위기에 빠졌을 때 한스에게 잠시 호황이 찾아왔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행복은 짧은 순간으로 사라진다.
전쟁의 아픔은 어느 한 쪽의 일상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은 일반인에게 무방비 상태에 놓여지고 최악의 상황을 만든다. 하지만 유대인과 독일인 어린 리젤의 불행한 시간에서 그래도 리젤은 유대인이 되는 것보다 나았다는 점이다. 유대인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사람도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독일인들은 그래도 살아갔다.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책은 어느 한쪽도 벗어날 수 없는 불행에서 이유없이 자신들의 삶이 무참히 짓밟혀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 속에서 어린 10대의 눈은 세상의 어떤 부조리함과 부당함을 발견한다. 이해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기차 안에서 목격한 동생의 죽음과 친엄마와의 헤어짐은 어린 소녀에게 충격이었고 적응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악몽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미쳐있는 세상에서 불안한 어린 소녀를 양아버지 한스가 지켰다.
소녀의 양어머니 로자 후버만은 위기 속에서 강한 힘을 발하는 인물이다. 책의 표현처럼 ˝매일이 절뚝절뚝 지나갔다.˝
그런 시간에서 로자는 일의 순서를 제대로 인지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양부모 한스와 로자는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는 10%의 독일인이다. 그래서 나치당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순수독일인 후버만 가족은 지하실에 유대인 막스를 숨겨주는 엄청난 모험을 한다.
리젤의 책도둑
책을 훔치는 것 리젤의 행동은 그래도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다. 그래서 진정으로 훔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도둑은 어른들이었다. 부자 나치들 그리고 군대였던 것이다. 그들은 내 아버지, 가족을 데려가는 가장 나쁜 도둑이었다.
힘멜의 거리가 폭탄과 함께 사라졌다.
소녀가 사랑한 친구 루디, 후버만 가족 그렇게 최고의 영혼들이 사라졌다.유일한 생존자 리젤은 최후의 한 명으로 살아 남는다.
굽어보는 자(죽음의 신) 조차도 이 상황이 눈물나게 슬프다.
남겨진 리젤의 아픔을 그저 바라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에 더 슬퍼한다.
이제 리젤에게 말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세상의 가장 추악한 힘을 담고 있는 저주스러운 말이다. 글을 읽을 수 없었던 리젤에게 말이 주는 힘을 느끼게 했던 책 속의 말들이 있었다. 그리고 리젤은 그 능력을 보았다. 하지만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던 날 말의 가혹함을 알게 되었다. 지젤은 그런 말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말이라는 것은 없었어야 한다고.
제2차 세계 대전의 하늘은 회색 빛의 하늘로 채워졌다.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태양도 푸르름을 자랑하던 자연도 다른 쪽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세상은 온통 한 가지색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죽음의 신은 세상을 굽어본다. 하지만 신의 심장도 그 시간은 객관적일 수 없었다. 한 소녀의 아름다운 이야기, 회색빛 세상에서 그래도 인간적인 영혼을 보았던 죽음의 신은 자신의 장점인 한눈팔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지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 하나
오랫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젊은이들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마지막 덧
정말 죽음의 신이 존재한다면, 전쟁 중 그는 업무과다로 한계에 달할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죽음의 신도 피해갈 수 없는 한계는 전시에 더 극으로 치닫지 않았을까
책의 앞 부분에 죽음의 신을 묘사하는데, 낫이 아닌 빗자루를 들고 있다는 부분이 생각났다. 갑작스럽게 빗자루를 든 죽음의 신이 상상되었다. 인간적인 죽음의 신 모습에 잠시 미소짓게 된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영화로 책도둑을 만날 날을 기대하며 이 여운을 접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