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추천?
1) 지금 각국의 정치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2) 민주주의가 과연 '좋은' 정치체제인지 한 번이라도 의심해보았다면
3) 민주국가에 사는 시민이라면
1. 알고보니 조건에 맞춘 결혼
일상 대화에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치 냉장고라고 하면 당연히 냉동실과 냉장실이 함께 있는 제품을 생각하듯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단히 융합된(amalgamated) 정치사상이 되었고 다수결 선거제도에 기반을 둔 대의제와 삼권분립을 통해 제도로 구현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믿었다. 야스차 뭉크의 탁월함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러한 결합이 강력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20세기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적 추세가 된 것은 후쿠야마의 표현처럼 ‘역사의 종언’으로서 보편적인 귀결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조건들이 (운 좋게)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우선 경제적으로 고도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인구 전반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 국내의 빈부 격차 또한 심화되지 않는 조건을 가리킨다. 대량생산 체제 하의 공장과 기업, 그리고 이들이 고용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통해 완전고용에 근접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믿음은 대중이 위정자, 통치제도, 법률에 대한 신뢰를 품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각국 정부는 독자적인 재정과 통화정책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라의 안과 밖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으로 비교적 균일한 하나의 ‘주류 집단’이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치단위가 되면서 앞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했던 분리주의나 식민지와 같은 국내정치적 원심력 또한 줄었다. (물론 인종 갈등과 인권 문제를 겪은 미국, 알제리 독립으로 국가 분열 위기까지 갔던 프랑스 등이 있으나 이들은 이전 시대의 유산 혹은 해소되지 못한 잔재였을 뿐, 이민 규모는 세계적으로 이 시기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 요인을 공고하게 만들면서 화룡점정을 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정보통신기술이었다. TV, 신문, 라디오로 대표되는 대중매체는 계급, 지역 등을 막론하고 한 국가 안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 여론, 의견을 수렴시키는 역할을 했다. 뭉크의 표현처럼 이들은 뉴스와 정보를 중요도, 의미, 파급력에 따라 1차적으로 걸러내는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민 간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적어도 다양성(이질성)이 보편성(동질성)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적 긴장: 누구의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기술문화적 조건은 사실 매우 이질적인 두 정치적 충동(drive)을 억지로 끌어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일원화와 집중, 전횡을 거부하기 위한 사상이다. 즉, 전제적인 주권자 개인이 폭정을 저지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권력기구를 쪼개고 서로 견제하고 이를 법과 제도로 명문화하는 것, 즉 입헌주의로 대표되는 법치와 분권이 자유주의자들의 최대관심사다.
20세기 초 래스키(Harold J. Laski)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정치적 다원주의=자유주의=입헌주의의 전통은 권력 집중을 막는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득권, 즉 기존의 권력관계를 법과 제도로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즉, 주권의 폭력성과 자의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훌륭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러한 비판의 대상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 소수의 계층 혹은 집단이 전문성, 문화자본, 인적 네트워크, 법적 지식을 갖추고 분권화된 권력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체제가 1인 독재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지 의문이다. 뭉크가 언급하고 있는 대표성의 약화로 인한 비민주적 자유주의(undemocratic liberalism)가 이러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반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분권이나 법치와는 무관하다. 다만 어떠한 통치자(집단)이든 대중(인민, 조직 구성원)의 뜻을 최대한 널리 수렴하고 반영하여 정책으로 시행하느냐, 그리고 무엇보다 그 뜻에 맞는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 통치자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정치체제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대중의 ‘뜻’을 어떻게 종합할 것이며, 그 뜻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는 또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기준의 모호성 혹은 부재야말로 민주정의 본질이다. 즉, 민주정이 어떠한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제도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판단기준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민주정(democracy)은 주의(-ism)가 아니라 정체(政體, cracy)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민주정은 독재정(autocracy), 귀족정(aristocracy)과 같이 권력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그것이 제도로 구현되는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유주의적 제도와 결합하면 자유민주주의가 되고 1인에게 대중의 뜻을 위임한다면 전제적 민주주의, 즉 대중독재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과정(제도)보다 결과(성과)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뭉크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가 곧 포퓰리즘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economy, stupid!),” “먹고사니즘,”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와 같은 구호가 각국의 정치판에 등장할 때부터 이미 포퓰리즘이 부활할 토양은 마련되고 있었다. 민주정의 충동을 제어하던 자유주의적 정치제도가 이제는 속박과 억압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3.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결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건부 결혼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반은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의 물결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자본의 세계적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기업의 생산, 판매, 유통이 국경을 초월하는 상황이 보편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경제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국민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결과적으로 재분배 정책 또한 약화되었다. 우리가 GNP(국가총생산) 대신 GDP(국내총생산)을 더 많이 듣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제는 자본(화폐, 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에 비해 노동(인간)의 이동은 여전히 제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화의 이득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재분배 정책 효과의 약화와 함께 국내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프랑코 밀라노비치가 제시한 그 유명한
‘코끼리 그래프’는 세계화의 과실이 선진국의 최상위층과 개도국의 중산층에게 집중적으로 돌아가는 반면, 선진국의 중산층 이하는 오히려 실질소득이 악화되는 양극화가 뚜렷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참조)
자유주의-민주주의 결합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한계에 봉착했다. 앞서 언급했던 경제정책을 위시해 환경, 에너지와 같은 초국가적, 범세계적 문제들이 등장하면서 어떤 정부도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이러한 새로운 이슈들은 모든 국가들의 동참과 협력에 대한 확약(commitment)과 조정(coordination)이 필요하지만 이탈하는 국가가 최대의 이득을 보면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유발하면서 결과적으로 각국 위정자들을 딜레마에 몰아넣었다. 즉, 자국에 (단기적으로) 최선이 되는 정책이 아님에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을 유권자들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반대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성과와 대표성에 대해 유권자들이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럽연합(EU)과 각국 중앙은행의 사례는 이러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의 위기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이러한 초국가적, 세계적 이슈들은 단기적 해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 개인과 개별 국가에 (이전에 부담하지 않았던) 상당한 제약과 비용을 부과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가 단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조정과정에서 (선진국의) 저소득층, 빈곤층, 덜 교육받은 계층이 상대적으로 가장 큰 비용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과(performance) 측면에서도 각국 정부는 과연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느냐는 지탄을 받기 십상인 구도다.
이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전문가에 대한 불신과 반지성주의 풍조와도 연관된다. 뭉크도 언급하고 있듯 선거비용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104-115쪽) 사실상 금권정치화가 진행되고 학력, 재산, 인맥의 관점에서 특정 집단, 심지어 소수의 특정 가문이 정치계를 과점하는 정치계급화는 이들을 ‘대중(the public)’과 유리시키면서 ‘정치전문가 집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한편으로는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인(아웃사이더)에 열광하는 세계적 흐름은 이러한 정서와 완벽히 부합한다.
또한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지성을 ‘위임’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사실은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해 거짓 정보를 전파하고 있다는 (과장된) 두려움과 믿음은 더욱 ‘평평한(level)’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The Death of Expertise> 참조.)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오히려 전문가에게 판단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매번 모든 정보를 의심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국민국가 체제의 약화, 경제적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 정보통신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보의 무차별적 유통,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결합되면서 벌어진 대표성의 위기와 전문성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집약되어 나타난 현상이 바로 반이민 운동이다. 이민의 규모나 추세를 보면 (아마도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에서도 기존의 인종/문화적 주류 집단이 그 지위를 위협받을 가능성은 낮음에도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이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면서 작은 위협도 크게 다가온다.
이는 경제학적, 뇌과학적으로도 설명가능한 현상이다. 인간은 이득보다 손실에 민감하며 인간의 뇌는 현재 상태의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즐거움, 두려움)에 따라 만족하거나 불만을 품는다.(<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참조.) 또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성취지위를 잃거나 애초에 획득에 실패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귀속지위(인종, 언어, 국적, 성별)에 집착하고(298쪽) ‘좋았던 옛날’과 ‘불안한 미래’를 대비시키게 한다.
4. 민주주의 4.0, 멋진 신세계, 혹은 1984?
그렇다면 주류 집단의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공포와 분노를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교화하고 계몽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까? 아니면 뭉크나 잉글하트가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듯이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 빈부 격차를 완화하고 계급의 고착을 억제하면 자유민주주의에 충분한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문제해결 이론(problem-solving theory)만으로 미봉할 만한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잉글하트와 뭉크도 인정하듯이, 자동화의 확대와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의 출현은 경제적 세계화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득은 (정치적으로 적절히 조정되지 않으면) 더욱 불균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보급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유경제가 붕괴된 기존 공동체를 대체할 새 공동체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도 시기상조다. 뭉크가 우버(Uber)의 사례를 통해 지적하고 있듯이(300쪽) 공유경제는 오로지 경제적 동기에 따라 한시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공동체들을 만들었다가 해체할 뿐이며 오히려 장기적이고 지속성 있는 유대를 형성하는 기존 생활공동체(그것이 가구(household)이든 직장(company)이든)를 잠식하고 대체한다.
그렇다고 소수자 집단 보호와 개별성 존중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뭉크 역시 이러한 ‘신좌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측에서 강조하는 ‘문화적 전유의 전면적 거부’가 결국은 극우적 순혈주의와 동전의 양면임을 이론적으로 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며(261-263쪽), 현실 세계에서도 정체성 정치에 함몰된 정치 세력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지난 대선 미국 민주당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주었다(<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참조). 개별성에 대한 존중은 결국 공동체성을 약화시킨 대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적인 공동체성을 제시하지 못하면 이 방향의 운동 역시 역사상 수많은 급진 운동처럼 단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뭉크가 제안하고 있는 ‘포용적 애국주의’가 한 가지 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공유 기억(shared memory)이 필요하다. 집단(에 속한 다른 구성원)과 나의 경계를 흐릴 수 있는 경험과 기억, 즉 ‘우리’의 관념을 강화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일시(identification) 혹은 경계의 모호함이 없어지면 근본적으로 가정도, 국가도, 공동체도 성립할 수 없다. 뭉크도 지적하듯이 이 부분에서는 교육 또한 큰 역할과 책임이 있다. 단지 사물에 대한 판단력만 있는 기술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313쪽) 인간에 대한 판단력 또한 갖춘 철학자를 길러내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치열한 비판은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모든 인간과 세계의 숭고함에 대한 존중과 경외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매트릭스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생각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라는 관념을 가진 물리적 실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또한 그에 걸맞은 호구지책이 따라야 한다. 다만 그것이 뭉크나 잉글하트가 제시하는 조세제도의 개편이나 조세회피처에 대한 추적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세계경제는 있지만 세계정부는 없고, 자본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 이동은 제약받는 근본적인 불균형 상황이 교정되어야 한다.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정치체가 등장해야만 해결될 문제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언급했듯 20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세 차례의 부침(wave)을 겪었다. 민주주의 첫 물결(대중 민주주의)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무너뜨렸지만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두와 함께 잦아들었고 그와 함께 제국주의도 함께 몰락했다. 두 번째 물결(반공산 민주주의)은 자유주의-민주주의-시장경제가 결합된 형태로 세계의 수많은 신생 국가들에 이식되었지만 일련의 군사 쿠데타와 공산화로 무너지거나 사실상의 독재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도래한 가장 최근의 세 번째 물결(반독재 민주주의)이 자유주의와의 결별과 함께 스러져가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소식은 불꽃이 꺼져가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민주주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목도하고 있는 변화가 <시작된 미래>에서 피터 프레이즈가 예견하고 있듯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라면, 우리가 기대하고 구상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4.0’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치체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