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로 번역되어 출간된 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소설 원제가 Departure(s)라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떠남’ 혹은 ‘작별’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유작으로 처음 읽은 셈인데, 그의 농담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 스무 권 이상 남아 있음에도 그의 마지막이 먼저 닿았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그의 떠남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그는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라며 자신의 방식대로 문학적 부고를 남기고 Departure했다. 노년의 소설가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정이 아니라, 먼저 도착한 뒤 다음 기착지를 모른 채 떠나는 생에 대해 그는 무엇을 남겼을까.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에서도 그는 평생 천착해 온 ‘기억의 불확실성’을 다시 탐구한다.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두 친구, 스티븐과 진은 20대에 만나 헤어진 뒤 60대에 이르러 재회하지만 결국 또 한 번 파국을 맞는다. 이들이 비어 있는 시간 동안 서로를 그리워했음에도, 다시 헤어진 이유를 하나의 사건이나 감정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서로의 삶에서 비어 있었던 시간 속에서 각자가 선택해 온 기억은 두 사람을 어긋나게 만든다. 이들은 재회 후에도 “중간에 낀 시기에 관해 말하지 않”(146쪽)는다. 각자 다른 자리에서 불러낸 기억은 결국 이들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같은 과거를 공유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기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반스는 초반부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유명한 일화를 불러온다. 마르셀은 어머니가 건넨 홍차에 마들렌을 살짝 적셔 입에 넣는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기억은 한 소년이 유년기를 지나 사랑을 알게 되고 삶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하는 통로로 작용한다. 프루스트의 화자에게 이러한 기억이 잃어버린 시간에 다시 닿게 하는 장치라면, 반스는 그 기억이 진실이기보다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서사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는 이전에 출간한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억의 한계와 역사의 왜곡에 대해 이야기했듯, 기록조차 완전한 기억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당신은 그런 기록이 좀먹은 오래전 기억보다 신뢰할 만할 것이라고 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다.”(48쪽)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기억이라고 여기는 것은 평생에 걸쳐 자주 또는 가끔 떠오르면서 말로 옮길 때마다 조금씩 변형을 일으켜 마침내 우리가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형태로 굳는 것이기 때문이다.”(22쪽)
이 소설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흥미로운데,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화자는 노년의 소설가인 ‘나’로 등장하는데, 독자는 그가 줄리언 반스 자신임을 자연스럽게 짐작하게 된다. ‘나’는 완치 불가능하지만 관리 가능한 혈액암을 앓고 있으며, 반스 역시 몇 해 전 희소 혈액암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이것이 분명히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떠나고, 이 책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뭔가를 쓰던 중간에 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런 식으로 죽음에 선택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하며 ‘교수대 유머’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우주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 역시 그 우주의 작용 속에서 싸움을 이어 가는 중이며, 언젠가 자신이 죽으면 암도 함께 사라질 것이니 결국 무승부로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 연휴는 줄리언 반스와 함께해서 기뻤다. 어느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어느 소도시의 따뜻한 어느 날, 한 카페 실외석에 나란히 앉아 우리 앞을 지나가는 다양하고 많은 삶의 표정들을 지켜보았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의 엘리자베스 핀치를 만났고, 역사에 기독교의 배신자로 기록된 율리아누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속 노년의 소설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역사도 의심하게 하는 흥미로운 엘리자베스 핀치와 비슷한 면도 많은 것 같다. 그가 이미 떠난 후에 그를 알게 되었지만, 나는 남아서 계속 구경하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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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그리고 기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엄청나게 투입되는 ‘사실들‘을 정신이 저장할 때 무엇이 잊히는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 P99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 강력한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공정하다고, 또는 공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뒤에, 어쩌면 우리의 현재 이해를 넘어선 어떤 근본적 수준에서는 공정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가의 믿음이 대비책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P199
T.S 엘리엇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일 뿐이라고 썼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들은 변한다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애인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억과 감정과 특질을 간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P202
우리는 가고, 우리는 도착하고, 우리는 귀환에 나서고, 다시 집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런 타성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런 궤도는 더 크고 더 모순된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우리 삶에서는 도착이 먼저 오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