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농업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다가 산업화 이후 도시로의 이주가 급속화되고 이에 도시 과밀화와 일자리 부족, 핵가족화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매번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고, 수업 시간마다 빨간 동그라미를 치며 외웠던 내용들. 그때 나는 이미 핵가족화된 가족의 구성원이었고, 산업화와 인구 과밀화의 중심인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들이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 내용이 떠오른 이유는 『분노의 포도』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시대에 허영에 찬 상류사회를 통해 미국의 이면을 드러냈다면, 『분노의 포도』는 산업화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린 하층민의 삶과 자본주의의 어둠을 보여준다.
그놈들이 트랙터로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우리한테서 뭘 빼앗아 갔는지 봐. 그놈들이 자기들 ‘이윤’을 지키려고 우리한테서 뭘 빼앗아 갔는지 보라고. 그놈들은 땅바닥에서 죽어 간 우리 아버지, 꽥꽥 소리를 질러가며 첫울음을 터뜨린 조, 밤에 덤불 속에서 숫염소처럼 날뛴 나를 빼앗아 가 버렸어. 그러고서 그놈들이 손에 넣은 게 뭐야? 우리가 사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야. 자동차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외롭게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아.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1930년대 대공황의 미국은 버림받은 땅이었다. 계속되는 모래바람과 가뭄으로 농작물을 거둘 수 없었고, 내년 수확물을 기약하며 은행에 돈을 빌렸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오랫동안 대대로 땅을 일구며 살아온 땅은 은행의 소유가 되었다. 조드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정 계층의 소수 미국인들은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부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지만, 자본이나 기술이 부족한 중산층 이하 도시민이나 농민들은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조드 가족은 오렌지색 전단에 유일한 희망을 걸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콩 따는 인부 모집 중. 일 년 내내 고임금 지급. 인부 800명 모집.’ 그러나 미국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66번 도로에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서 도망쳐 먹을거리와 일자리가 있다는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열심히 포도밭에서 일하면 몇 달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집을 살 수 있을 거야”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 떠나듯 캘리포니아로 향했고, 이 고된 여정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톰의 형은 말없이 사라지며,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은 달아나 버린다. 그렇지만 가족은 선택의 여지없이, 막연한 기대를 품고 나아간다.
"그 작자한테 필요한 건 200명인데, 그 작자는 500명한테 얘길 합니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를 하죠. 그래서 그 장소에 가 보면 사람이 1000명이나 모여 있어요. 전단지를 뿌린 사람은 ‘한 시간에 20센트를 주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중 절반이 그냥 가 버리죠. 하지만 아직도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배가 고프기 때문에 돈 한 푼 안 주고 빵만 준다고 해도 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사람들이 배가 고플수록, 그 작자가 임금을 적게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톰 조드의 가족은 이내 좌절한다. 땅과 일자리와 존엄을 찾기 위해서 온 캘리포니아는 또 다른 고통의 땅이었다.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고 기업화된 농장들은 담합하여 임금이 턱없이 낮아졌고, 굶주린 사람들은 길 위에서 병들어 죽어갔다. 희망을 찾아 떠나온 이들의 마음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했고,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를 맺었다. 그럼에도 자본가들은 농산물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작물을 태워 버렸다. 주어진 땅을 일구며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이들의 소망이 무너지며 급속하게 이루어진 산업화와 기계화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뜨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비옥한 땅, 곧게 자라는 나무들, 튼튼한 줄기, 다 익은 열매. 그런데 펠라그라를 앓고 있는 아이들은 그냥 죽어 갈 수밖에 없다. 오렌지가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검시관들은 사망 증명서에 사인을 영양실조로 적어 넣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일부러 식량을 썩히고 있기 때문에.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우린…… 최선을…… 다했어.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까?”
지금 우리 사회도 분노의 포도가 무르익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시대에서나 경제 양극화는 존재했지만, 청년세대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서울 집값은 10년간 월급을 꼬박 모아도 부모님 도움 없이 아파트한 채도 마련할 수 없다.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며 활력을 잃고 있는 현실, 열심히 해도 희망이 안 보이는 나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의해 사회의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존 스타인벡은 작품에서 어떠한 정치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경 속에서도 서로 돕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계급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크기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